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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행23:12-35절0,
대산지기
2007. 2. 8. 11:05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행23:12-35절. 408.404.429장.&
지난 단락(23:1-11절)에서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주님이 직접 곁에 서서 위로와 용기를 주신 사실을 살펴 보았습니다. 11절 말씀에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찾아오시며 위로하시며 초자연적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초자연의 방법으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어서 택한 자들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문제와 시험과 시련 그리고 세속적인 위기가 닥쳐올 때,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사람을 동원해서 그 일을 처리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 하늘에서 직접적인 초자연적 방법으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이웃을 통해서 일을 이루게 하시고 심지어 가족의 충고를 통해서도 안정을 갖게하고 피할 길을 주시기도 합니다. 특별히 설교자의 복음을 통해서 생애의 진로를 바꾸게 하시고 새 힘을 얻게도 하시며 문제 해결을 얻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위기와 시험과 아픔을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과 우리 주변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이고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동족에게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완전히 감당할 수 없었을 때, 어두운 밤에 주님이 친히 바울의 곁에 찾아 오셔서 담대하라 하시면서 한없는 위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주님의 위로와 권면이 바울에게 놀라운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죽이려는 무리들 중에는 과격한 사람들이 특공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바울을 처치하기 위하여 40여명이 단식투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통고하면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단식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요구를 제시 했습니다. 첫째로, 공의회.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천부장에게 범인 인도를 요구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천부장에게서 대제사장으로 호송하는 중에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통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함께 살피는 대로 인간의 심성의 타락과 문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대인들은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고발하고 단식투쟁과 데모를 했었는데,
이제 바울이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며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증거했을 때 유대인들은 이를 갈며 바울을 처치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단식투쟁에 돌입하고, 주권을 빼앗긴 유대의회와 정치 지도자들이 꼼짝없이 결사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코너에 몰아 넣는 요구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과격한 사람들이 하는 방식이 단식투쟁입니다. 동지들을 결속시키고 관계된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방법이 단식투쟁이었습니다. 요즈음 한국 사람들이 자주 써먹는 방법은 옛날에 써먹던 아주 오래된 방법이었습니다. 단식투쟁(斷食鬪爭)은 생명을 걸고 요구조건을 관철하는 방법입니다.
참 이상한 것은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울을 가만 놔 두었다가는 자기들의 죄악이 백일천하에 드러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백성들에게 먹혀 들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을 대적하기 보다는 예수를 대적한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복음을 반대하고 복음 증거자를 멸시하고 반대하는 것은 인간의 어두움과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가 혹시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과 아픔을 당해도, 그것은 우리 개인을 미워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은, 그들의 입지와 기만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그들에게 복음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아멘으로 영접했으나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아는 척했고 스스로 믿음이 있는 듯이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생명의 복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가문과 지위와 재물과 학벌이 때로는 단순하고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받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유대 율법주의자들 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진리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1)라고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믿는 것이며,
그 믿음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주셨으니 이 얼마나 단순한 복음입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렇게 단순한 복음을 역사와 전통과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불행이었고 그래서 40여명의 과격분자들이 단식투쟁을 결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16절부터 전개되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순간 바울이
대제사장(大祭司長)으로 호송(護送)되다가 도중에 40여명의 과격분자들에게 테러를 당해서 죽게될지도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옥문이 갈라지거나 천둥 번개가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바울의 생질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생질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떤 사람임을 알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이 구절에만 나타날 뿐이었습니다.
다만 이 본문대로 보면 "유대인들이 매복하여 있다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고 했습니다(16절).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인물을 모두 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사에 역할을 감당할 사람만이 나타납니다.
바울의 생질은 단 한 번 나타났지만 하나님의 종 바울이 위기를 만났을 때 이 사실을 바울에게 알려주는 전달병 역할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합니다. 그는 이름도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져서 결정적 시기에 한 몫을 감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린 어느 분의 인도로 예수 믿게 된 경우는 없습니까 ? 또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위기에 있을 때, 나에게 길을 열어주고 도움을 준 분들이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보내신 도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면서 어느 것 하나라도 감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매 순간 순간 인도해 주심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정도의 신앙을 갖는 것은 한차원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과 이적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에게 늘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은 생질로부터 유대인 결사대가 조직되었음을 알고 백부장에게 알리고 그 생질을 천부장에게 인도하도록 했습니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죄수 바울이 이 청년을 시켜서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생질이 천부장에게 유대인들의 동태를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천부장은 바울의 생질에게 비밀 누설을 경계하고 바울을 구출할 작전(作戰)을 세웠습니다. 천부장의 지시는 이러했습니다. 백부장 둘을 불러 밤 세시에 보병 200명 기마병 70명 그리고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저격수라고 할 수 있는 창군 200명을 준비해서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기 위하여 말을 준비(準備)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偉大)합니까? 죄수 바울을 구출하기 위하여 로마의 천부장이 470명의 경계병과 호위병을 배치하여 호송하는 것은 이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하찮은 개인을 도구로 쓰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조직과 세상 권세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죄수 바울을 안전하게 인도하기 위해서 천부장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470여명의 호위병에 둘러 싸여 40마일을 여행하여, 안디바드리지역까지 와서 위험지역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70명의 마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천부장의 군사력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이때 바울의 모습은 죄수 호송이 아니고 차라리 대왕의 행차나 대통령(大統領)의 행차(行次)보다 더 큰 경호를 받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전도자로 쓰시고 아직도 할 일이 많았으므로 바울을 그토록 아끼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낭패와 실망, 좌절 그리고 슬픔과 위기를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택한 자를 지키기 위하여 천군 만마를 동원하시는 주님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 또 하나 살펴볼 것은 루시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루시아의 마음을 다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요 유대인들의 고소가 율법에 대한 견해차일 뿐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아님을 말하고 바울을 해치려는 간계가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헤롯 궁에 갇히게 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입체적인 작전을 시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에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대 설교가 캄벨 몰간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그 곳은 감옥이었다. 그러나 감옥은 주께서 그의 종을 위하여 제공할 때는 궁전이 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위기에 처한 바울을 구출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감동시키고 보호하심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기쁘신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고백(롬8:28)은 바울의 이런 실제적 체험에서 나온 줄 믿습니다. 우리의 개인과 가정을 살펴볼 때 위기와 문제 투성이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를 통해서든지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영의 눈과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건(事件)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의 긍휼과 자비(慈悲)를 보는 시각(時刻)이 열려지기를 소원(素願)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말씀을 증거(證據)하는 설교자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권면하시며 일으키실 때 반드시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교역자의 권면을 통해서 이루어가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고 사람을 도구로 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맑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로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를 꼭 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이 되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23:12-35절. 408.404.429장.&
지난 단락(23:1-11절)에서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주님이 직접 곁에 서서 위로와 용기를 주신 사실을 살펴 보았습니다. 11절 말씀에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찾아오시며 위로하시며 초자연적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초자연의 방법으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어서 택한 자들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문제와 시험과 시련 그리고 세속적인 위기가 닥쳐올 때,
하나님은 우리 주변의 사람을 동원해서 그 일을 처리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때 하늘에서 직접적인 초자연적 방법으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이웃을 통해서 일을 이루게 하시고 심지어 가족의 충고를 통해서도 안정을 갖게하고 피할 길을 주시기도 합니다. 특별히 설교자의 복음을 통해서 생애의 진로를 바꾸게 하시고 새 힘을 얻게도 하시며 문제 해결을 얻게도 하십니다.
우리가 위기와 시험과 아픔을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과 우리 주변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이고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을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동족에게 무수히 구타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완전히 감당할 수 없었을 때, 어두운 밤에 주님이 친히 바울의 곁에 찾아 오셔서 담대하라 하시면서 한없는 위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주님의 위로와 권면이 바울에게 놀라운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죽이려는 무리들 중에는 과격한 사람들이 특공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바울을 처치하기 위하여 40여명이 단식투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통고하면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단식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요구를 제시 했습니다. 첫째로, 공의회.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 동의를 얻어서 천부장에게 범인 인도를 요구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천부장에게서 대제사장으로 호송하는 중에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통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함께 살피는 대로 인간의 심성의 타락과 문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대인들은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고발하고 단식투쟁과 데모를 했었는데,
이제 바울이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며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증거했을 때 유대인들은 이를 갈며 바울을 처치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단식투쟁에 돌입하고, 주권을 빼앗긴 유대의회와 정치 지도자들이 꼼짝없이 결사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도록 코너에 몰아 넣는 요구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과격한 사람들이 하는 방식이 단식투쟁입니다. 동지들을 결속시키고 관계된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방법이 단식투쟁이었습니다. 요즈음 한국 사람들이 자주 써먹는 방법은 옛날에 써먹던 아주 오래된 방법이었습니다. 단식투쟁(斷食鬪爭)은 생명을 걸고 요구조건을 관철하는 방법입니다.
참 이상한 것은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울을 가만 놔 두었다가는 자기들의 죄악이 백일천하에 드러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백성들에게 먹혀 들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을 대적하기 보다는 예수를 대적한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인간이 복음을 반대하고 복음 증거자를 멸시하고 반대하는 것은 인간의 어두움과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가 혹시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과 아픔을 당해도, 그것은 우리 개인을 미워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울이 전한 예수의 복음은, 그들의 입지와 기만을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그들에게 복음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아멘으로 영접했으나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아는 척했고 스스로 믿음이 있는 듯이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생명의 복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가문과 지위와 재물과 학벌이 때로는 단순하고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받는데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유대 율법주의자들 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진리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1)라고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마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믿는 것이며,
그 믿음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주셨으니 이 얼마나 단순한 복음입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렇게 단순한 복음을 역사와 전통과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불행이었고 그래서 40여명의 과격분자들이 단식투쟁을 결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16절부터 전개되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절박한 순간 바울이
대제사장(大祭司長)으로 호송(護送)되다가 도중에 40여명의 과격분자들에게 테러를 당해서 죽게될지도 모르는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옥문이 갈라지거나 천둥 번개가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바울의 생질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생질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떤 사람임을 알 길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이 구절에만 나타날 뿐이었습니다.
다만 이 본문대로 보면 "유대인들이 매복하여 있다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고 했습니다(16절).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인물을 모두 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사에 역할을 감당할 사람만이 나타납니다.
바울의 생질은 단 한 번 나타났지만 하나님의 종 바울이 위기를 만났을 때 이 사실을 바울에게 알려주는 전달병 역할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게 합니다. 그는 이름도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져서 결정적 시기에 한 몫을 감당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도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린 어느 분의 인도로 예수 믿게 된 경우는 없습니까 ? 또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위기에 있을 때, 나에게 길을 열어주고 도움을 준 분들이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보내신 도구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면서 어느 것 하나라도 감사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을 매 순간 순간 인도해 주심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정도의 신앙을 갖는 것은 한차원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과 이적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에게 늘 기쁨이 넘칩니다.
바울은 생질로부터 유대인 결사대가 조직되었음을 알고 백부장에게 알리고 그 생질을 천부장에게 인도하도록 했습니다. 백부장은 천부장에게 죄수 바울이 이 청년을 시켜서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생질이 천부장에게 유대인들의 동태를 소상히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천부장은 바울의 생질에게 비밀 누설을 경계하고 바울을 구출할 작전(作戰)을 세웠습니다. 천부장의 지시는 이러했습니다. 백부장 둘을 불러 밤 세시에 보병 200명 기마병 70명 그리고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저격수라고 할 수 있는 창군 200명을 준비해서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 보내기 위하여 말을 준비(準備)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偉大)합니까? 죄수 바울을 구출하기 위하여 로마의 천부장이 470명의 경계병과 호위병을 배치하여 호송하는 것은 이는 전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하찮은 개인을 도구로 쓰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조직과 세상 권세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죄수 바울을 안전하게 인도하기 위해서 천부장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470여명의 호위병에 둘러 싸여 40마일을 여행하여, 안디바드리지역까지 와서 위험지역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70명의 마병의 호위를 받으면서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천부장의 군사력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이때 바울의 모습은 죄수 호송이 아니고 차라리 대왕의 행차나 대통령(大統領)의 행차(行次)보다 더 큰 경호를 받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전도자로 쓰시고 아직도 할 일이 많았으므로 바울을 그토록 아끼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낭패와 실망, 좌절 그리고 슬픔과 위기를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택한 자를 지키기 위하여 천군 만마를 동원하시는 주님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승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 또 하나 살펴볼 것은 루시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루시아의 마음을 다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요 유대인들의 고소가 율법에 대한 견해차일 뿐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아님을 말하고 바울을 해치려는 간계가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헤롯 궁에 갇히게 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바울을 살리기 위해서 입체적인 작전을 시도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에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대 설교가 캄벨 몰간은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그 곳은 감옥이었다. 그러나 감옥은 주께서 그의 종을 위하여 제공할 때는 궁전이 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위기에 처한 바울을 구출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감동시키고 보호하심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기쁘신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고백(롬8:28)은 바울의 이런 실제적 체험에서 나온 줄 믿습니다. 우리의 개인과 가정을 살펴볼 때 위기와 문제 투성이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를 통해서든지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영의 눈과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건(事件)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의 긍휼과 자비(慈悲)를 보는 시각(時刻)이 열려지기를 소원(素願)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말씀을 증거(證據)하는 설교자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권면하시며 일으키실 때 반드시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교역자의 권면을 통해서 이루어가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고 사람을 도구로 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맑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로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를 꼭 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이 되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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