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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죄(謝罪)의 은총(恩寵), (행26:24-32절),

대산지기 2007. 2. 8. 11:04
사죄(謝罪)의 은총(恩寵)
행26:24-32절, 182.193.206장.&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迎接)했는가를 간증(干證)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과 부활(復活)을 설교하고 있을 때 베스도 총독(總督)이 갑자기 끼어들어 바울의 말을 중단(中斷) 시키면서 바울에게 모독적인 밀을 퍼부었습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가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의 답변은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정신차린 말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국왕과 총독 그리고 수많은 고관들 앞에서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것을 보고 베스도는 놀랐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의 말을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따위 말을 하는 자는 정신나간 사람이며 미치광이나 하는 짓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현대인들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실히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을 미쳤다고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베스도는 아그립바왕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면서 설교하는 바울을 그냥 보아줄 수 없어서 끼어 들었습니다. 그가 왜 주제넘게 끼어 들었는 지는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울이 가진 학문이 미치게 했다는 것을 보면 적어도 바울의 학문의 깊이를 인정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베스도의 논리는 너같이 배운 놈이 그따위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했다는 것을 생명을 내걸고 증거하는 것을 보니 미쳤구나 하는 비아냥 거림이었습니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바울은 당대의 최고의 명문대학 가말리엘 선생의 수제자로서 법학을 공부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 유행했던 철학과 수사학 논리학을 배운 당대의 최고의 지성에다 가정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감히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로마 시민권을 소유했던 그가 나사렛 예수의 부름을 받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에게 붙들려 그의 죽음과 부활을 중거하는 것은 베스도의 입장에서나 아그립바왕의 입장에서 보면,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면 바울이 미쳤는지, 베스도 총독이 미쳤는지 이미 판가름 났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참말을 하고 정신차린 말이었으며 베스도와 아그립바왕의 정권욕과 탐욕이 미쳤음을 역사가 증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한가운데 우리의 열정과 복음증거의 내용을 보고 미쳤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실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목회자 또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기업의 이사도 있고, 중소기업의 사장도 있고, 대학교수도 있고, 장군출신도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높은 봉급과 사회적 명성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신학교로 몰려오는 이들도 많습니다.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의 위대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예수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개업 의사는 복음에 붙들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목사가 되어 시골 개척교회로 내려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산부인과 의사를 하다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면목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들은 정말 어리석고 바보같은 미친 사람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쳐도 무엇에 미쳤는가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문제는 권세도 명예도 부도 한 때이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미쳐도 영원한 삶, 영원한 진리,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 미쳐야지 유한하고 변하고 썩어 질 것에 미쳐 버린다면 그 댓가는 반드시 치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를 못믿겠다는 사람들도 다 무엇엔가 미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정권욕으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구데타를 일으켜서 무자비하게 광주 학살을 자행했던 사람들이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고, 불법과 탐욕으로 나랏 돈을 천문학적 숫자로 모은 사람들이 역사의 단죄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세상법정의 심판이 없다해도 역사의 심판이 있고 양심의 심판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인간은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 법망을 피할 수 있고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불꽃같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인간은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외에도 조금씩은 미쳐 있습니다. 어떤 이는 주색잡기에 미쳐 있고, 어떤 이는 노름에 미쳐서 가산을 탕진하고, 가정이 파괴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등산에 미치고, 어떤 이는 골프에 미치고 어떤 젊은이는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는 패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 열락에 빠져서 아까운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참 건전한 미침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에컨대 학문에 미친다거나, 예술에 미치거나, 수집에 미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무엇엔가 미쳐 살고 있습니다. 그럴바에는 참된 진리, 복음에 미치고 예수 사랑, 하나님 사랑에 미치고 이웃을 섬기는 데 미치기를 바랍니다. 바울을 미치게 한 그 생명의 복음은 인생을 변화시켜, 영원한 삶을 살게 하며 세상을 변화시켜 사람 살 곳이 되게 한 것입니다.

바울을 미치게 한 그 복음은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줄 믿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바울은 아그립바왕의 양심과 양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베스도 총독의 참견을 일축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에게 혁명가나 논쟁자의 이미지를 보이지 않고, 왕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서 말했습니다. 26절에서 말하기를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을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 편 구석에서 행한 일이 아니로소이다"라고 정중히 설득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한 것은 너무나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이고 당시의 정치적 이유였고,세상이 다 아는 사실임을 밝혔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정권과 교권이 다 달라 붙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중시위를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던 그 사건, 돌무덤에 황제의 어인을 찍어서 로마군대를 풀어서 경계를 했던 일, 그리고 3일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모든 사람에게 보이셨던 그 사건은 유대인이면 모를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그립바왕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의 입으로 그것을 시인하도록 다그쳤습니다. 이제 사태는 역전되고 도리어 아그립바가 심문을 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난처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다시 한번 다그쳤습니다. 27절에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그립바를 더 큰 궁지에 몰아 넣었습니다. 유대인인 아그립바가 선지자의 말을 모를리 없고 선지자가 에언한 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임을 그도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에언만 456번 나타나는데 양심적인 유대인이라면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코너에 몰리자 대답을 회피한 채 딴전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28절에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정직한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왕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크리스챤이 되도록 전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임금들 앞에서 전도하도록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를 이곳까지 오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의 세계화를 위해서 하나님은 바울을 도구로 쓰시고 계십니다.

성령(聖靈)께서 바울을 붙드시고 성부(聖父)와 성자(聖子) 하나님이 바울 곁에서 동시에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의 말에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29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통쾌했습니다.

바울을 재판하던 사람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저들의 판단은 바울의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사 황제에게 이송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원했던 바이며 또한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수에 한번 미쳐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에 한번 미쳐 봅시다. 여러분이 세상에 미쳐 있는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예수에 미쳐 봅시다. 신앙이 안 자란다느니, 재미가 없다느니, 힘이 빠졌다느니, 부담이 된다느니 하지만 예수에 미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줄 믿습니다.

주일성수 못하고 십일조도 못한다고 하지만 예수에 미치고 진리에 미치면,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신 남편이 하는 말을 믿기는 믿되 미치지는 말고 대강 대강 출석하고 대강 대강 시간봐서 형편봐서 나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믿어도 목사의 얼굴이나 구역장 얼굴봐서 믿어주는 것처럼 살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에 예수에 미친사람 10명 만 있어도 일좀해 보겠습니다. 오늘날 자녀 교육에 모두 정신 나갔습니다.

자녀 교육에 전폭을 기울이는 것, 나쁠 것 없지만 전 세계에서 대학시험치는 아이들에게 도시락 싸들고 뛰어가고 교문에 찰떡과 엿을 더덕 더덕 붙이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영혼에 대해서 얼마나 걱정하고 아이들의 영성에 대해서 얼마나 기도합니까?

그들의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도록 교육하는데 얼마나 시간을 투자합니까? 하나님께 맡겨 봅시다. 어느 학교 어느 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인격이 정직하고 깨끗하게 열린 마음으로 예수 믿어서 한 인간으로 제대로 성장하도록 도와 줍시다.

낚시에 미친 사람은 비가 와도 우의를 덮어쓰고 꼬박 밤을 새우고, 노름에 미친 사람은 눈이 벌개져서 밤을 지새우고 돈을 탕진합니다. 수석에 미친 사람은 온 산과 하천을 헤메면서 정말 미친 듯이 싸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걸핏하면 바쁘다, 피곤하다,

힘들다, 부담된다고 핑계합니다. 믿을 바에는 좀 확실하게 믿읍시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볼 때 예수에 미치고 말씀에 미쳤다고 보일 정도로 믿어 봅시다. 예수 믿는 것이 주업이고 세상사는 일이 부업이 되도록 해 봅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수에 미치고 진리에 미치면 모든 것을 이기며 모든 것을 극복하며 모든 것을 주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열을 예수님께 쏟아부어 하나님께 인정 받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간증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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