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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담대 하라. (행23:1-11절)

대산지기 2007. 2. 8. 11:01
담대 하라
행23:1-11절, 102.415.511장&

오늘 읽은 본문은 바로 사도 바울이 가장 어렵고 깊은 좌절에 빠졌을 때 주께서 친히 그의 곁에 오셔서 "담대하라"고 위로와 격려를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울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바울로 하여금 위기를 탈출해서 새로운 소망과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주님의 위로의 한 마디가 삶을 역전시켰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전후를 잘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본문 1절에서 11절까지를 살펴보면 1절에서 10절까지 낮시간에 바울이 당한 핍박과 수모가 어떠함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1절에는 가장 고독하고 낭패와 실망당한 바울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위로와 격려와 새로운 사명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본문을 전후한 상황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큰 뜻을 품고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예루살렘에 상경했고, 이방교회에서 거둔 헌금까지 가지고 왔으나 그를 대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죽이려고 모두가 폭도처럼 길길이 날 뛰었습니다. 오직 로마의 천부장에게 체포된 것이 폭도들에게 변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동족에게 무참히 폭행을 당했으나 도리어 이방인으로 부터 보호를 받은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육간에 아울러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더구나 자기 동족에게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의 마음 가운데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실망과 패배감으로 가득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육체적인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깊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 백성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와 위로와 축복을 받은 반면에, 그래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동족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습니다.

도리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설교 했을 때, 집단구타에다 돌팔매질 그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들었을 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본문을 순서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을 체포한 로마의 장교 천부장은 바울에게 무슨 죄목이 있는 지를 알기 위하여 바울을 고소, 고발하는 사람들 앞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의 태도는 여전했습니다. 살기 등등한 군중들의 집단 폭행에서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은 천부장 뿐이었다는 것도 사실 슬픈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너무나도 서럽고 군중들 앞에 너무나도 자기의 존재가 작아보이고 의기소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한 것을 보면 군중들 마음을 어느 정도 누그러 뜨리고 안정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는 바울도 이와같은 핍박자들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 의기소침하고 낙심했거늘 우린들 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그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이라도 받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도 못하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못 일어나도록 만들려고 기를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낙심과 좌절, 그리고 핍박과 공포를 해결해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떤 의지로도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은 자기 결단과 의지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 그리고 성령(聖靈)의 감동(感動)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고쳐주시는 줄 믿습니다.

절망(絶望)의 순간(瞬間)들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고통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도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는 주께서 말씀으로 찾아 오신다는 사실이며 그것만이 우리의 위로가 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1문에는 인생의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를 묻고, 거기 해답하기를 우리의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절망과 환난과 핍박이 있다고 해도 겁낼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는 자의 위로가 되시며 병든 자의 고침이 되시고 죽은 자의 부활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공의회 앞에서 첫째로 자신은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선언했고 둘째는 부활을 전하다가 심문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첫마디를 하자마자 대제사장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이란 사람이 이 정도의 악감을 가졌으니 다른 사람들의 감정은 어떠했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폭언을 듣자 마자 바울은 갑자기 분노의 말로 그에게 맞대응했습니다.

3절에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바울로서는 강도 높은 반격이었습니다. 회칠한 담 또는 회칠한 무덤이란 이중인격자란 표현입니다.

법집행자가 법대로 안하는 세상, 법만드는 사람이 초법적으로 행동하는 사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병든 사회요, 썩은 사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칠한 담이며 회칠한 무덤입니다. 악한 마음 갖고 일하는 자들이 도리어 의의 편에 선 사람을 고발하고 박해하는 세상이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때 곁에 섰던 사람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 대제사장인 줄 몰랐다고, 하면서 즉각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과는 불의에 대한 항거 자체를 사과한 것이 아니고 그 항거의 방법에 관한 사과였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칼빈은 바울의 이 말이 하나의 풍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생각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대제사장 같지 않기에 욕했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적으로(출 22:22),

관원을 비방치 말라한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찌됐건 폭력행사도 마다 하지 않는 대제사장에게 바울의 말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23:6절)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말 때문에 바울을 탄핵하고 고발하던 무리를 두 쪽으로 갈라놓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위기를 모면하려는 태도이기 보다는 자기(自己)가 전하는 복음(福音)이 바로 부활(復活)의 복음(福音)이라는 사실을 공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의 입장과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 사이에 쐐기를 박은 꼴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내용이 10절까지의 줄거리입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그날 밤에 일어난 사건이 11절 한 절 가운데 요약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유의 몸이 아니었고 감옥의 어두움과 냉기가 그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고요는 찾아 왔으나 낮시간에 시달린 일들로 머리에 꽉찼었습니다. 순수한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예루살렘에 상경해서 얻은 결과로서는 영육간에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의와 진리가 통하지 않는 세상 그리고 동족의 배신감, 또한 예루살렘 전도의 실패감이 그의 로마에 복음을 전하려던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는 듯한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은총의 포로로 전도자가 된 후에 가장 절망적인 위기의 시기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가 쓰는 사람 그의 그릇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1절은 "그날 밤"이란 말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날 밤 더 할 나위 없이 외롭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처절한 절망 가운데 있는 바울에게 찬란한 태양 빛이 비추이듯이 주님이 바울의 곁에 서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곁에 주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바울이 회개하기 전에도 알고 계셨고 그의 전도 여행(旅行) 중에도 영으로 동행(同行)했습니다. 물론 바울의 고난(苦難)은 주님의 고난에 비할 바 아니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福音)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할 정도로 그는 복음 때문에 숱한 고생과 고통과 돌팔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순간에 바울을 찾아 오셔서 위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담대하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은 깊은 절망에 빠진 바울을 붙들어 올리는 주님의 강한 음성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복음은 실패한 것이 아니고 성공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만 보지만 주님은 더 깊은 속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로마에서도 증거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로마 전도는 자기 뜻이라기 보다는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도 주의 일을 하는 중에 또는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더 없는 실패와 좌절감과 고통과 아픔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판단으로는 완전히 끝났다고 좌절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담대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담대하라"했고 이삭과 야곱에게도 엘리야, 모세, 기드온, 베드로에게도 결정적인 시기에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낙심치 말라! 의지하라! 바라보라! 놀라지 말라! 힘있게 붙들라고 권고하십니다.

히브리10:35절에는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2:13절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6:9절에는"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에베소3:11-12절에는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권고이며, 위로이며, 명령입니다. 그리고 용기와 확신을 가지고 주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리시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주저 주저하는 자보다는 죄를 자복하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를 기뻐 받아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 만으로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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