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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전도(傳導) 기회, (행21-17-40절)

대산지기 2007. 2. 8. 10:41
바울의 전도(傳導) 기회
행21:17-40절, 344.462.496장.&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죽음이 기다린다고 해도 주 예수께 받은 소명 곧 전도를 위해서는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확신하고 모든 만류를 뿌리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도착 장면부터 이 본문은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선은 이 본문의 내용을 잘 살피고 그 뜻을 깨달은 후에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진리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은 바울을 따뜻이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그동안 바울의 선교사역 중에 있었던 승리의 보고를 자세히 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흐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선교 보고를 들으면서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 선교에서 얻은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나타남으로서 생긴 당면한 위험성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예루살렘 본부교회는 교회가 세워진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예수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의 갈등은 여전히 있었고 또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챤이 되었으면서도 아직도 유대주의적인 전통과 율법에 얽매여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나실인 서원 아래 있는 네 사람이 그 서원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바울에게 제안하기를 모든 비용을 댈 터이니 결례의 마지막날까지 그들과 함께 지낼 것을 권고했습니다. 장로들이 바울에게 이렇게 제안한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폐한다는 소문이 자자함으로 불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큰 소동을 일으킬지도 모르고, 그것 때문에 자기네들도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까 해서 그런 제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시기는 때마침 오순절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중요한 절기었으니 만큼 유대인들로, 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적어도 200만명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분위기는 참 미묘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민족은 로마의 압제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반란과 데모가 언제 일어날런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한편 로마 당국은 유대인들의 반란과 데모를 사전에 진압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準備)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년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적대자였던 바울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가 되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복음 운동의 지도자로 돌아와서, 율법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설교하게 되니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과거 행적을 잘 아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서는 바울이 예루살렘 도착 자체가 불신 유대인들의 반란과 데모의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울이 가지고 온 헌금에도 관심이 없었고 바울의 방문자체를 껄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본문 20절에 있는 대로"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되 여전히 유대주의 관계와 의식을 지키는 신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성도들의 신앙 태도에 대해서 잘못된 것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 성도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오해와 비난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믿는 유대인들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의식(儀式)과 관례(冠禮)를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들은 바울의 신앙의 내용을 잘 알면서도 바울에게 그것을 요구(要求)했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그들의 요구에 동의한 사실입니다. 얼른 보면 이런 바울의 태도는 그의 목회사역에 커다란 실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동의는 단순히 편의주의적이고 정략적인 방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바울이 그의 동족을 구원코저 하는 뜨거운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롬9:1-5절의 그의 고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은 상황에 대한 요령껏 대처나 폭동을 막고자 하는 잔꾀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나 부지하려는 태도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충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도 바울이 장로들의 의견을 따른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울은 복음을 전도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의 기득권이나 체면이나 명성 따위도 포기할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늘 체면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하고 복음이 땅끝까지 증거되어야 하는 열정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신앙도, 기도도, 봉사도, 전도도 자신을 낮추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自己)를 개방(開放)하고 비워두십시오. 그리고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확실(確實)히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성경(聖經)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바울은 동족애의 뜨거운 사랑으로 동의했지만 애당초 장로들이 의도했던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이 목적했던 것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자신(自身)의 확신(確信)을 굽히면서까지 장로(長老)들의 제안에 동의했던 것은 그의 형제(兄弟)들에게 복음(福音)을 증거(證據)할 기회(期會)를 만들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結果的)으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불신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발광을 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장로들의 제안을 따랐던 것은 동족에게 복음 증거하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통해서 깊은 진리를 몇가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도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기독교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해서 성경과 교리를 무시한 채로 되어진다면 그 결과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사랑이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도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물론 사랑과 진리의 조화는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강조하다 보면 진리가 허물어지기 쉽고 진리를 강조하다 보면 사랑이 식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진리 안에서의 사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옛말에 손주를 지나치게 사랑하면 할아버지 상투를 뽑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랑만 있고 법이 없으면 무질서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하되 교회의 법을 순종하고 지키는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귀엽다 하여 사랑만 하면, 버룻없는,
사람이 되듯이 사랑도 진리 안에서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교회는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교리는 아무래도 좋고, 아예 교리를 논하지 말고, 그것은 각자 알아서 믿으면 되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살펴 볼 것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이른바 신앙(信仰)의 혼합주의를 용납(容納)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독교 복음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옛날 유대주의의 의식과 전통과 관례를 그대로 용납하려는 태도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도 이런 경향이 많습니다.

복음을 불교식으로 믿거나 유교식으로 믿고 샤마니즘적으로 믿는 등 이상한 신앙 운동도 적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갑자기 성도들이 불어나면서 여기저기 신학교가 세워지고 많은 기도원 가운데는 건전한 기도원을 찾기가 쉽지 않는 터입니다.

그래서 혼합주의적인 기독교 운동이 판을 치는 이때입니다. 우리 교회는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에 든든히 서서 오직 성령,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진리를 확실히 불들어야겠습니다.

끝으로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은 아시아에서 온 불신 유대인들이 모든 무리를 충동질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불신 유대인들은 갑자기 폭도로 돌변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율법을 훼방했을 뿐 아니라 이방인 헬라 사람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이 벌어지고 불신 유대인들이 바울을 집단 폭행하고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갔습니다. 로 바울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소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로마의 군부에 전해지자 사건이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면 로마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겠으므로 오늘날의 연대장 쯤에 해당되는 천부장에게 보고되고 천부장은 오늘날의 대대장 정도에 해당하는 백부장에게 병력을 풀어서 사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랬더니 불신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구타를 그치고, 부장이 바울의 신변을 인도 받아서 쇠사슬로 결박했습니다. 그때 무리들은 바울을 처벌하라고 고래 고래 고함을 치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진리는 로마의 천부장이 바울을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불신 유대인들의 폭력과 구타 그리고 돌팔매질로 죽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로마군의 천부장을 통해서 바울을 구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기를 만났을 때 기회를 주십니다. 얼른 보면 로마군에 체포된 것은 불행한듯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로서 사도 바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도하다가 위험이 닥치고 환난이 오는데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바울은 천부장에게 부탁해서 쇠사슬에 묶인 채로 복음 전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정말 절묘한 하나님의 간섭이며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군에 체포되어 도리어 불신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하게 됐으니 바울의 배후에 주님이 함께 하심을 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에 최선을 다합시다. 우리의 배후에 주님이 계시고 절대로 실패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담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쇠사슬에 묶였으면 두려움과 공포에 자기 몸 가누기도 힘겨울텐데 쇠사슬에 묶인채 복음을 증거하려는 모습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성령에 사로 잡히면 그러한 힘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지상명령 마28:19,20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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