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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도자(前導者) 바울. (행21:1-16절)
대산지기
2007. 2. 8. 10:41
전도자(前導者) 바울.
행21:1-16절, 259.488.235장.&
오늘 읽은 본문 중에 핵심 구절인 13절에는"…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승부를 걸 때 죽을 각오로 임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승부이며 무엇을 위해서 죽을 각오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랑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어떤 이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명예와 학문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귀와 쾌락을 위해서 죽을 각오로 인생의 승부를 겁니다. 인생은 쓸데 없는 일에 죽을 각오로 승부를 거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헌신한다면 하나님이 위대한 그릇으로 쓰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생명을 거는 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은 결정됩니다. 전도에 우리의 승부를 걸어 봅시다. 신앙에 우리의 승부를 걸어 봅시다.
그러면 이 본문의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깊은 진리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2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바울이「주님을 위한 죄수」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속박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지난 주일에 살핀 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슨일을 당할런지 잘 알면서도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행20:22-24절에 말하기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런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성도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토록 가슴이 뜨겁고 확신에 찬 메시지를 했습니다. 복음전도에 생명을 걸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장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 누가는 좀 독특한 시각으로 이 본문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순례가 흡사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과 유사하다는 것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내용을 감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을 예언했듯이,
성령께서 세 번씩이나 환난이 바울을 기다린다고 증거한 바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괴롭고 고통스러우셨듯이(마26:13절), 바울의 마음도 심히 상했습니다(행21:13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처럼 바울 사도도 이 본문에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니이다"고 했습니다(행21:14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고난과 속박과 죽음의 길이었듯이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상경도 속박과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의지가 위대했고 그의 신앙이 위대했다기 보다,
그와 함께 하시는 주의 능력을 믿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옥중에서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에게 쓴 글에는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절)고 했습니다. 정권은 바울의 육신은 옥에 가둘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옥에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로에 살고 있는 제자들이 바울에게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행21:4절). 또 가이사랴의 성도들도 바울의 예루살렘 상경을 말렸습니다.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 당할 것을 예언하면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를 동여 매는 시늉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던 바울에게는 그런 만류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 곧 순교의 정신을 갖고 있는 바울의 길을 막을 자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예수의 영이 살아 있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충만히 있고 성령의 내재 하심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 심령에 있다면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 힘있게 일 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아니고 사도 바울도 아니고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도 아니고 우리는 평범하고 부족한 성도들입니다.
비록 순교는 못할 망정 주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몸을 최선을 다해서 헌신해야 되겠습니다. 비록 복음을 위해서 죽지는 못할지라도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라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주님의 그 사랑에 감격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만큼, 복음을 위해서 욕도 먹어 보고 무안도 당해 보고 약간의 고통도 아픔도 맛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전도를 위해서 수고와 고통을 피해 다니는 사람치고 신앙이 자라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걸핏하면 부담이 된다느니 바쁜사람을 왜 불러 내냐느니 하면서 아주 쉽게쉽게 부담없이 예수 믿으려고 합니다.
물론 편하기는 하겠지만 주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도 없고, 주님의 은혜와 말씀에 대한 기쁨도 없고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복음 때문에 내 가정을 위해서 내 남편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 울어도 보고, 전도지 한 장이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해주어도 보고, 종이 한 장이라도 접어 보고 무엇인가 일감을 찾아서 헌신이 있을 때 성경을 이해하고 신앙의
맛을 조금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순교까지는 못해도 순교정신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즐기는 기독교, 복받는 기독교는 되어가도 복음을 위해 주의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 진리를 지키기 위한 순교정신이 사라져가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록 부족해도 순교(殉敎)정신(精神)을 이어가는 교회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족해도 진리를 파수하는 일에 있어서 앞장 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연약해도 최선을 다해서 주의 교회을 위해 헌신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본문에서 또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빌립을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시겠지만 바울과 빌립은 20년 전 악연으로 만났습니다.
20년 전 빌립은 예루살렘 초대교회(初代敎會)의 일곱 집사(執事) 중에 하나였고 당시 사울이란 청년(靑年)은 그리스도의 대적자로서 복음의 훼방꾼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을 모조리 잡아 죽이려고 작정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당시 바울은 가문과 학벌과 지위와 권력 그리고 기득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가 말하는 이른바 나사렛이단을 쫓는 무리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입니다.
드디어 스데반이 순교(殉敎)를 당하고 청년(靑年)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逮捕)하는 우두머리로 길길이 날뛰고 있을 때 성도들은 사방에 흩어져 잠적하고 빌립도 사마리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 어느날 빌립은 바울을 영접하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빌립은 바울의 복음운동에 길을 닦아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준 사람이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더욱이나 고넬료가 믿기 전에 주님이 사울을 은총의 포로로 만들기 전에, 또한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빌립은 안디옥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로서 평신도였지만 복음의 세계선교를 위해서 사명을 다했습니다.
세레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길을 평탄케 한 사람이라면 빌립은 사도 바울의 전도를 위해서 길을 닦은 것입니다. 과거 20년 전에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만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빌립의 집에서 바울과 두 손을 맞잡고 20년 전을 회상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떠했는지는 그저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 선생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저를 알아 보시겠습니까? 라고 빌립이 환영했을 때 바울은 아마, 빌립 집사 참으로 반갑소! 집사님의 전도 활동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소. 그 동안 정말 한 번 보고 싶었소.
그러니까 20년 전 이놈이 예수 모르고 겁없이 우쭐대며 집사님을 죽이려고 했던 나를 용서해 주오. 나는 죄인이었소! 이제 내가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소. 이제 우리는 남은 평생 함께 복음을 위해서 일합시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은 또 말하기를 바울 선생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오늘의 큰 사도로 바울 선생님을 만든 것이 아닙니까? 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제로 오늘날도 이런 일이 무수히 많습니다. 예수 모르고 예수 말만 해도 이를 갈고, 예수 말만 해도 불쾌하고 예수 믿는 아내를 욱박지르고 예수 믿는 형제를 미워하고, 예수 믿는 친척을 멸시하던 사람이 세월이 지나서 어느날 만나보니 신학생이 되고,
그리고 목사되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대 부흥사 김익두 목사도 깡패였습니다. 이천석 목사도 상이군인으로서 온갖 짓을 다하다가 예수의 붙들린 바 되어 큰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20년 전에 악연으로 만났던 사람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兄弟)와 자매(姉妹)가 된 사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사람을 판단(判斷)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예수 안믿고 절대로 복음(福音)과 관계(關係) 없다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곧 복음은 폭탄입니다. 바울도 복음의 폭탄에 쓰러진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복음(福音)의 불에 데인 사람은 모두가 변화(變化)될 줄 믿습니다. 복음(福音)에 녹아지고 부서지는 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조급하게 전도가 잘 안된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과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람을 뒤집어 놓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항거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福音)으로 때리면 옛사람은 파괴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유언(遺言)의 말씀 딤후4:2절에 있는 대로"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記憶)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죽을 각오로 복음을 증거해 보십시오! 그리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런 큰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쫓기고 쫓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마음으로 멀어졌던 우리가 복음으로 하나되고 수많은 심령이 예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힘이되어 주시며 능력이 되어주셔서 어떠한 사명을 부여 받아도 능히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행21:1-16절, 259.488.235장.&
오늘 읽은 본문 중에 핵심 구절인 13절에는"…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승부를 걸 때 죽을 각오로 임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승부이며 무엇을 위해서 죽을 각오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사랑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어떤 이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의 명예와 학문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귀와 쾌락을 위해서 죽을 각오로 인생의 승부를 겁니다. 인생은 쓸데 없는 일에 죽을 각오로 승부를 거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죽을 각오로 헌신한다면 하나님이 위대한 그릇으로 쓰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생명을 거는 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은 결정됩니다. 전도에 우리의 승부를 걸어 봅시다. 신앙에 우리의 승부를 걸어 봅시다.
그러면 이 본문의 전후좌우를 살피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의 깊은 진리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선 사도행전 2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바울이「주님을 위한 죄수」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속박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지난 주일에 살핀 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슨일을 당할런지 잘 알면서도 결연한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행20:22-24절에 말하기를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런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성도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토록 가슴이 뜨겁고 확신에 찬 메시지를 했습니다. 복음전도에 생명을 걸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장을 기록하고 있는 저자 누가는 좀 독특한 시각으로 이 본문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순례가 흡사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과 유사하다는 것을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내용을 감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을 예언했듯이,
성령께서 세 번씩이나 환난이 바울을 기다린다고 증거한 바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마음이 심히 괴롭고 고통스러우셨듯이(마26:13절), 바울의 마음도 심히 상했습니다(행21:13절).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던 것처럼 바울 사도도 이 본문에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니이다"고 했습니다(행21:14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고난과 속박과 죽음의 길이었듯이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상경도 속박과 고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의지가 위대했고 그의 신앙이 위대했다기 보다,
그와 함께 하시는 주의 능력을 믿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옥중에서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에게 쓴 글에는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절)고 했습니다. 정권은 바울의 육신은 옥에 가둘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옥에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로에 살고 있는 제자들이 바울에게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했습니다(행21:4절). 또 가이사랴의 성도들도 바울의 예루살렘 상경을 말렸습니다.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 당할 것을 예언하면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를 동여 매는 시늉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었던 바울에게는 그런 만류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 곧 순교의 정신을 갖고 있는 바울의 길을 막을 자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예수의 영이 살아 있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충만히 있고 성령의 내재 하심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 심령에 있다면 우리도 복음을 위해서 힘있게 일 할 수 있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아니고 사도 바울도 아니고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도 아니고 우리는 평범하고 부족한 성도들입니다.
비록 순교는 못할 망정 주의 나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몸을 최선을 다해서 헌신해야 되겠습니다. 비록 복음을 위해서 죽지는 못할지라도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라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주님의 그 사랑에 감격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만큼, 복음을 위해서 욕도 먹어 보고 무안도 당해 보고 약간의 고통도 아픔도 맛을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전도를 위해서 수고와 고통을 피해 다니는 사람치고 신앙이 자라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걸핏하면 부담이 된다느니 바쁜사람을 왜 불러 내냐느니 하면서 아주 쉽게쉽게 부담없이 예수 믿으려고 합니다.
물론 편하기는 하겠지만 주님의 구원에 대한 감격도 없고, 주님의 은혜와 말씀에 대한 기쁨도 없고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 복음 때문에 내 가정을 위해서 내 남편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 울어도 보고, 전도지 한 장이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해주어도 보고, 종이 한 장이라도 접어 보고 무엇인가 일감을 찾아서 헌신이 있을 때 성경을 이해하고 신앙의
맛을 조금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순교까지는 못해도 순교정신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즐기는 기독교, 복받는 기독교는 되어가도 복음을 위해 주의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 진리를 지키기 위한 순교정신이 사라져가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비록 부족해도 순교(殉敎)정신(精神)을 이어가는 교회이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부족해도 진리를 파수하는 일에 있어서 앞장 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연약해도 최선을 다해서 주의 교회을 위해 헌신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본문에서 또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빌립을 만났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시겠지만 바울과 빌립은 20년 전 악연으로 만났습니다.
20년 전 빌립은 예루살렘 초대교회(初代敎會)의 일곱 집사(執事) 중에 하나였고 당시 사울이란 청년(靑年)은 그리스도의 대적자로서 복음의 훼방꾼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을 모조리 잡아 죽이려고 작정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당시 바울은 가문과 학벌과 지위와 권력 그리고 기득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그가 말하는 이른바 나사렛이단을 쫓는 무리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고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입니다.
드디어 스데반이 순교(殉敎)를 당하고 청년(靑年)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逮捕)하는 우두머리로 길길이 날뛰고 있을 때 성도들은 사방에 흩어져 잠적하고 빌립도 사마리아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 어느날 빌립은 바울을 영접하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빌립은 바울의 복음운동에 길을 닦아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준 사람이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더욱이나 고넬료가 믿기 전에 주님이 사울을 은총의 포로로 만들기 전에, 또한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 빌립은 안디옥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로서 평신도였지만 복음의 세계선교를 위해서 사명을 다했습니다.
세레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길을 평탄케 한 사람이라면 빌립은 사도 바울의 전도를 위해서 길을 닦은 것입니다. 과거 20년 전에 쫓고 쫓기던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만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얼마나 놀라웠겠습니까? 빌립의 집에서 바울과 두 손을 맞잡고 20년 전을 회상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떠했는지는 그저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 선생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저를 알아 보시겠습니까? 라고 빌립이 환영했을 때 바울은 아마, 빌립 집사 참으로 반갑소! 집사님의 전도 활동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소. 그 동안 정말 한 번 보고 싶었소.
그러니까 20년 전 이놈이 예수 모르고 겁없이 우쭐대며 집사님을 죽이려고 했던 나를 용서해 주오. 나는 죄인이었소! 이제 내가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소. 이제 우리는 남은 평생 함께 복음을 위해서 일합시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은 또 말하기를 바울 선생님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오늘의 큰 사도로 바울 선생님을 만든 것이 아닙니까? 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제로 오늘날도 이런 일이 무수히 많습니다. 예수 모르고 예수 말만 해도 이를 갈고, 예수 말만 해도 불쾌하고 예수 믿는 아내를 욱박지르고 예수 믿는 형제를 미워하고, 예수 믿는 친척을 멸시하던 사람이 세월이 지나서 어느날 만나보니 신학생이 되고,
그리고 목사되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대 부흥사 김익두 목사도 깡패였습니다. 이천석 목사도 상이군인으로서 온갖 짓을 다하다가 예수의 붙들린 바 되어 큰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20년 전에 악연으로 만났던 사람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兄弟)와 자매(姉妹)가 된 사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사람을 판단(判斷)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예수 안믿고 절대로 복음(福音)과 관계(關係) 없다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곧 복음은 폭탄입니다. 바울도 복음의 폭탄에 쓰러진 사람입니다.
오늘날도 복음(福音)의 불에 데인 사람은 모두가 변화(變化)될 줄 믿습니다. 복음(福音)에 녹아지고 부서지는 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조급하게 전도가 잘 안된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과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람을 뒤집어 놓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항거할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福音)으로 때리면 옛사람은 파괴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유언(遺言)의 말씀 딤후4:2절에 있는 대로"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記憶)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죽을 각오로 복음을 증거해 보십시오! 그리하면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런 큰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쫓기고 쫓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마음으로 멀어졌던 우리가 복음으로 하나되고 수많은 심령이 예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힘이되어 주시며 능력이 되어주셔서 어떠한 사명을 부여 받아도 능히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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