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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성이 인간에게 주를 찾게하라,(행17:16-34)
대산지기
2007. 2. 8. 10:38
종교성이 인간에게 주를 찾게하라.
행17:16-34절. 360.424.462장.*
이 세상에는 무종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인간은 누구나 종교를 다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를 믿고, 어떤 사람은 유교를 믿고, 어떤 이는 태양신을 섬기고, 혹자는 산신령을 믿습니다.
어떤 분은 하다못해 고사나 기우제를 드리며, 북한에는 김일성(김정일)종교를 믿습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상 종교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환자가 치료제를,
먹는다는 것이 독약을 먹는 것처럼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지만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엉뚱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이 종교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한 종교성입니다. 짐승에게는 종교성이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나 짐승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짐승에게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종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게, 친척들에게 전도할 때 낙심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의 지혜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종교를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의 배경과 분위기를 이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깊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성경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주로 헬라 도시들을 방문하면서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전도하면서 많은 결실도 얻었지만 박해도 계속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바울과 함께 온 성도들은 아덴까지 약 200마일을 여행하면서 바울을 아덴에 내려주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와 실라는 아직 베뢰아에 남아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이 아덴에 와서 합류하기를 막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핍박과 박해를 통해서 바울을 헬라문화의 중심인,아덴 곧 오늘날의 아테네시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러책들 가운데 흔히 기독교 신앙과 이교신앙을 비유하면서 예루살렘과 아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면서 헬라문화에 도가 통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가 되었던 그가 이교도의 성지요 인본주의의 본거지인 아덴에 입성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기록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도 우리를 흥분케 하는 사건이며, 복음이 이교도들에게 어떻게 증거될 수 있는가 하는 실예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좀더 사도 바울이 입성한 아덴을 살펴 보겠습니다.
물론 이 본문의 계시가 아덴이라는 도시에 있지 않고 사도 바울의 설교이지만 바울의 설교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덴을 생각해 보려는 것 뿐입니다. 사실 헬라문화의 중심지 아덴은 그 당시의 인구가 5천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세기의 아덴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5세기에 아덴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과 지성적인 우월성을 지닌 도시였습니다. 아덴은 철학과 예술 그리고 문학 등에 있어서 인류역사의 최고봉이었습니다. 아덴은 뿐만 아니라 위대한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을 배출했습니다.
인류역사에 그 도시만큼 아름답고 견고한 예술품과 건축물이 없으리만큼 대단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인류 역사의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모두 아덴 출신입니다. 아직도 모든 철학과 사상들은 이 세 사람의 사상을 근거로 해서 논해지고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헬라철학들은 지금도 세계 모든 사상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4대 비극시인 가운데 3명이 아덴 출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가진 27년간의 비극적 전쟁으로 예술과 사상과 문학에 나타났던 그들의 영광은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호기심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아덴의 거리에는 자칭 타칭 모두가 철학자들로 우글 거렸습니다. 그들은 시장이나 길거리에서나 어디든지 토론하기를 좋아했고,나름대로의 궤변을 늘어 놓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학파들이 대종을 이루었습니다. 에피큐리안 철학자들과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덴의 거리를 걸으면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이른바 철학자들과 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가슴에 불타는 복음의 불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교철학의 본부에,복음으로 가슴이 타는 바울을 특공대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 아덴을 둘러보는 바울의 심정은 타는듯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 분하다는 표현은 참 좋습니다. 오늘 우리는 현대의 우상의 도시인 서울을 바라보며 분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꼭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들고 거기 절하는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그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과학을 우상시 하기도 하고, 인간 자신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뉴에이지 운동도 우상 운동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유물주의 운동, 권력과 폭력과 쾌락주의도 우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헛된 영웅주의 사상도 우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탈렌트, 영화배우, 가수, 야구선수, 개그맨들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우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울의 거리는 우상의 거리입니다. 동경의 거리도 우상의 거리입니다. 뉴욕의 거리도 우상의 거리입니다. 파리도, 런던도, 암스텔담도 사실은 우상의 거리입니다.
우리는 화란의 경제학자 밥 하우츠바르트박사의 말처럼 현대인의 우상에 절할 것인가 현대인의 우상을 부수는 일에 앞장 설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우상이,가득한 아덴 거리를 보고 분명히 통분을 느꼈습니다. 우상과 죄를 보고도 통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심령이 무딘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아덴의 거리를 보고 조각과 미술과 건축의 도시로 보겠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우상을 본 것입니다. 오늘 한국도 문화재나 미술품을 빙자해서 국가적 지원을 얻고 있는 우상운동이 얼마나 있습니까? 때로는 우상 운동이 정권의 비호를 받고, 경제권의 도움을 얻어서 동양최대니 한국 제일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화폐에다 우상을 새겨서 대권을 잡으려는 사람도 있고, 그뿐 아니라 믿는 사람도 우상 앞에, 묵념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보이는 우상과 보이지 않는 우상 모두를 제거해야 개인도, 가정도, 민족도 바로 삽니다. 야곱의 가정에도 우상이 들어왔듯이 현대 크리스챤에게도 우상이 들어 왔습니다.
우리 개인과 교회가 옳게 서려면 이 거대한 현대인의 우상운동과 한 판 결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우상 제거 운동이 바로 교회개혁 운동이며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이 성경을 보면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의 변론을 듣고 말쟁이라고 격하시켰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내용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이 새 교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해했던 새 교는 바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기독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빼고는,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도대체 예수는 누구며 예수의 부활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알려고 했을 뿐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 때에 아레오바고에서 그 유명한 바울의 노상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설교의 첫 마디가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17:22절)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헛된 철학으로 응고된 그들에게 던진 접촉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설교의 서두는 설교학적인 기교가 아니고 사실 인간은 모두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단 접촉점으로 제시한 것이 훌륭합니다. 칼빈은 인간의 종교성을 가리켜서"종교의 씨앗"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종교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이 종교성 곧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준 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도록하기 위함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직도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이웃을 대할 때 소망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예수 믿는 것을 핍박하던 이가 신앙 생활을 바로 하며 도리어 더 철저히 하는 것을 봤고 과거에,우상 섬기는데 철저하던 사람이 예수의 복음을 깨닫고부터 우상을 다 불태워 버리고 더 힘있게 예수 믿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성이 있습니다. 인간 외에 종교성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체험을 얻을 때 비로소 변하여 새사람 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접촉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관심을 갖도록 하십시요. 우선 구원의 문제와 영생의 문제에 고민하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 후에 설교에서 헬라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지만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은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임을 선포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온 우주를 다스리며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며 간섭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만든 신과 스스로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자연 종교로서 사람의, 지혜로 된 것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종교는 오직 유일신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웅장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영광과 감사를 돌려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는 복음이 풍성한 시대입니다.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골목마다 교회이고, 서점마다 성경책이고,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기독교인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는 지나고 복음의 황금기에 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 안믿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믿어도 옳게 믿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합니다. 이 귀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이상합니다. 물론 복음을 들은 사람이 모두가 믿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새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불과 소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수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온 산천을 태우듯 이 작은 불꽃이 우리 가정에, 우리 이웃에 붙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가족과 이웃에도 종교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도 대상자는 많이 있습니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성령님의 도움으로 입술을 벌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안내하시는 복된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17:16-34절. 360.424.462장.*
이 세상에는 무종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인간은 누구나 종교를 다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교를 믿고, 어떤 사람은 유교를 믿고, 어떤 이는 태양신을 섬기고, 혹자는 산신령을 믿습니다.
어떤 분은 하다못해 고사나 기우제를 드리며, 북한에는 김일성(김정일)종교를 믿습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상 종교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마치 환자가 치료제를,
먹는다는 것이 독약을 먹는 것처럼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지만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엉뚱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이 종교성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 본문에서 말한 종교성입니다. 짐승에게는 종교성이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나 짐승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짐승에게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종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에게, 친척들에게 전도할 때 낙심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의 지혜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종교를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의 배경과 분위기를 이해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깊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성경의 흐름을 추적해 보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주로 헬라 도시들을 방문하면서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전도하면서 많은 결실도 얻었지만 박해도 계속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바울과 함께 온 성도들은 아덴까지 약 200마일을 여행하면서 바울을 아덴에 내려주고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디모데와 실라는 아직 베뢰아에 남아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이 아덴에 와서 합류하기를 막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핍박과 박해를 통해서 바울을 헬라문화의 중심인,아덴 곧 오늘날의 아테네시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러책들 가운데 흔히 기독교 신앙과 이교신앙을 비유하면서 예루살렘과 아덴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면서 헬라문화에 도가 통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포로가 되었던 그가 이교도의 성지요 인본주의의 본거지인 아덴에 입성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기록 가운데 가장 극적이면서도 우리를 흥분케 하는 사건이며, 복음이 이교도들에게 어떻게 증거될 수 있는가 하는 실예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좀더 사도 바울이 입성한 아덴을 살펴 보겠습니다.
물론 이 본문의 계시가 아덴이라는 도시에 있지 않고 사도 바울의 설교이지만 바울의 설교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덴을 생각해 보려는 것 뿐입니다. 사실 헬라문화의 중심지 아덴은 그 당시의 인구가 5천명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세기의 아덴 사람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며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5세기에 아덴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과 지성적인 우월성을 지닌 도시였습니다. 아덴은 철학과 예술 그리고 문학 등에 있어서 인류역사의 최고봉이었습니다. 아덴은 뿐만 아니라 위대한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을 배출했습니다.
인류역사에 그 도시만큼 아름답고 견고한 예술품과 건축물이 없으리만큼 대단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인류 역사의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모두 아덴 출신입니다. 아직도 모든 철학과 사상들은 이 세 사람의 사상을 근거로 해서 논해지고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르친 헬라철학들은 지금도 세계 모든 사상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4대 비극시인 가운데 3명이 아덴 출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가진 27년간의 비극적 전쟁으로 예술과 사상과 문학에 나타났던 그들의 영광은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호기심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아덴의 거리에는 자칭 타칭 모두가 철학자들로 우글 거렸습니다. 그들은 시장이나 길거리에서나 어디든지 토론하기를 좋아했고,나름대로의 궤변을 늘어 놓기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학파들이 대종을 이루었습니다. 에피큐리안 철학자들과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덴의 거리를 걸으면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이른바 철학자들과 대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가슴에 불타는 복음의 불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교철학의 본부에,복음으로 가슴이 타는 바울을 특공대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 아덴을 둘러보는 바울의 심정은 타는듯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 분하다는 표현은 참 좋습니다. 오늘 우리는 현대의 우상의 도시인 서울을 바라보며 분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꼭 돌이나 나무를 깎아 만들고 거기 절하는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그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과학을 우상시 하기도 하고, 인간 자신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뉴에이지 운동도 우상 운동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유물주의 운동, 권력과 폭력과 쾌락주의도 우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헛된 영웅주의 사상도 우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탈렌트, 영화배우, 가수, 야구선수, 개그맨들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우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울의 거리는 우상의 거리입니다. 동경의 거리도 우상의 거리입니다. 뉴욕의 거리도 우상의 거리입니다. 파리도, 런던도, 암스텔담도 사실은 우상의 거리입니다.
우리는 화란의 경제학자 밥 하우츠바르트박사의 말처럼 현대인의 우상에 절할 것인가 현대인의 우상을 부수는 일에 앞장 설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우상이,가득한 아덴 거리를 보고 분명히 통분을 느꼈습니다. 우상과 죄를 보고도 통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심령이 무딘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의 아덴의 거리를 보고 조각과 미술과 건축의 도시로 보겠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우상을 본 것입니다. 오늘 한국도 문화재나 미술품을 빙자해서 국가적 지원을 얻고 있는 우상운동이 얼마나 있습니까? 때로는 우상 운동이 정권의 비호를 받고, 경제권의 도움을 얻어서 동양최대니 한국 제일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화폐에다 우상을 새겨서 대권을 잡으려는 사람도 있고, 그뿐 아니라 믿는 사람도 우상 앞에, 묵념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보이는 우상과 보이지 않는 우상 모두를 제거해야 개인도, 가정도, 민족도 바로 삽니다. 야곱의 가정에도 우상이 들어왔듯이 현대 크리스챤에게도 우상이 들어 왔습니다.
우리 개인과 교회가 옳게 서려면 이 거대한 현대인의 우상운동과 한 판 결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우상 제거 운동이 바로 교회개혁 운동이며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이 성경을 보면 아덴의 철학자들은 바울의 변론을 듣고 말쟁이라고 격하시켰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새롭고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한 내용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이 새 교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해했던 새 교는 바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기독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슴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빼고는,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도대체 예수는 누구며 예수의 부활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알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알려고 했을 뿐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이 때에 아레오바고에서 그 유명한 바울의 노상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때의 설교의 첫 마디가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17:22절)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헛된 철학으로 응고된 그들에게 던진 접촉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설교의 서두는 설교학적인 기교가 아니고 사실 인간은 모두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단 접촉점으로 제시한 것이 훌륭합니다. 칼빈은 인간의 종교성을 가리켜서"종교의 씨앗"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종교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이 종교성 곧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준 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믿도록하기 위함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직도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이웃을 대할 때 소망없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예수 믿는 것을 핍박하던 이가 신앙 생활을 바로 하며 도리어 더 철저히 하는 것을 봤고 과거에,우상 섬기는데 철저하던 사람이 예수의 복음을 깨닫고부터 우상을 다 불태워 버리고 더 힘있게 예수 믿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성이 있습니다. 인간 외에 종교성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체험을 얻을 때 비로소 변하여 새사람 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접촉점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선 관심을 갖도록 하십시요. 우선 구원의 문제와 영생의 문제에 고민하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 후에 설교에서 헬라 철학자들과 시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경배하지만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은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임을 선포하고 그러기에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온 우주를 다스리며 통치하시며 섭리하시며 간섭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만든 신과 스스로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자연 종교로서 사람의, 지혜로 된 것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종교는 오직 유일신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웅장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영광과 감사를 돌려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는 복음이 풍성한 시대입니다.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골목마다 교회이고, 서점마다 성경책이고,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기독교인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는 지나고 복음의 황금기에 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예수 안믿는 것도 이상하거니와 믿어도 옳게 믿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합니다. 이 귀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이상합니다. 물론 복음을 들은 사람이 모두가 믿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새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불과 소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수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온 산천을 태우듯 이 작은 불꽃이 우리 가정에, 우리 이웃에 붙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가족과 이웃에도 종교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도 대상자는 많이 있습니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성령님의 도움으로 입술을 벌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안내하시는 복된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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