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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교회.(행17:1-15절),

대산지기 2007. 2. 8. 10:38
성경을 상고 하는 베뢰아 교회
행17:1-15절, 245.246.265장.*

빌립보는 기독교가 유럽에 교두보를 구축한 첫번 도시였습니다. 빌립보에서 교회가 세워지게 된 그 자체를 실상 세계 선교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를 살펴볼 때 복음의 승리가 있으면 반드시 핍박과 박해가 뒤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핍박과 환난이 있으면 반드시 복음운동은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이 모두를 적절하게 관리하셔서 결국은 사도들의 배후에서 또한 교회의 설립배경에서 섭리하시고 관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우리만큼 큰 재미를 보기도 했지만 정작 빌립보에서 불신자들은 바울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바울과 실라는 제2차 선교 여행 중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누가를 빌립보에 남겨 둔 채 100마일을 걸어서 데살로니가로 왔습니다. 가는 도중에 두 도시를 통과했습니다. 빌립보에서 33마일쯤 가서 군사 주둔지인 암비볼리에 도착했고 그후에 다시 30마일을 여행하면서 아볼로니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37마일을 더 걸어서 드디어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째서 가버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 일행에 대한 성령의 인도 때문이란 결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결국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는 도시의 성격이 서로 다르고 위치가 서로 다릅니다. 하여간에 이 두 곳은 바울의 유럽전도의 또 다른 교두보 구축이 되는 곳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대로변에 위치해 있고, 베뢰아는 샛길로 한참 들어가서 있습니다.

그런데 퍽 흥미있는 것은 바울의 전도가 대로변의 데살로니가에서 의외의 승리와 박해를 동시에 받았고, 뿐만 아니라 베뢰아에서도 예기치 않게 승리를 거두었고 또 어려움도 받았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는 바울 일행이 핍박과 박해에 지쳐서 잠시 조용한 곳 베뢰아를 찾아서 얼마간 쉬려고 했는데 뜻밖에 큰 은혜와 말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가 감히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시간에 우리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게 된 것은 칼빈의 의사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칼빈은 성격적으로는 조용하게 연구하는 것만을 좋아하고 몸도 항상 병약하여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하리 만큼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한 곳에 가서 성경연구와 바른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쉬려고 제네바를 통과하면서 한 여관에 투숙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 이미 종교개혁 운동을 하던 파렐이 찾아와서 칼빈에게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때 당시 파렐은 나이 많고 칼빈은 약관 27세였습니다. 칼빈은 자기는 개혁의 지도자가 될 제목이 못된다고 극구 사양했을 때 파렐은 호통치기를 당신이 만약 제네바에 머물면서 개혁의 지도자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릴 것이라고 호통했습니다.

칼빈은 그 말에 그만 항복하고 제네바의 종교개혁 뿐 아니라 유럽의 실제적 종교 개혁자가 되어 오늘의 프로테스탄트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예상 밖의, 놀라운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빌립보에서 핍박이 없었더라면 거기 머물러 안주해 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아픔과 고통을 주시는 것도 결국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을 준비하는 신호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우리 본문에 돌아와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 증거되고, 다음으로 이방인에게 증거되어야 한다는 그의 원리에 입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야만인이나 그의 동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소망(素望)이 그리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3주를 데살로니가에 보내면서 세 번이나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물론 그가 가진 성경은 구약(舊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대로 보면"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2∼3절)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사실 강해설교의 원리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 했다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 중에는 성경을 자기 사상 증거를 위해서 인용하는 사람이 많고, 성경 그 자체를 강해하는 분들은 많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좀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교회가 되려면 흥미 위주의 예화나 간증보다도 성경본문을 깊이 깨닫게 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하는 강해 설교가 많이 발전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성경에 맛을 들이기 보다는 이상한 체험이나 간증에 신앙의 기초를 세우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다른 이의 체험이나 간증도 우리를 깨우치는데 도움이 되고 특히 불신자들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인생이 새롭게 되고, 변화되고 바로 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구체적 삶에서 길이 되고, 빛이 될 때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다음에 "뜻을 풀어"란 말씀입니다. 이 말의 본 뜻은"열어서 주장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의 뜻을 열어서 주장하는 것도 강해설교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번역대로 그것의 뜻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8절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도 사도행전17:2-3절의 말씀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깨닫게 할 때 회개의 역사와 은혜가 풍성히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철학으로 사람을 설득시켜 보려는 운동은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강해 설교의 내용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지고 결론 맺은 점입니다. 바울은 구약 본문을 가지고 설교했지만 결국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귀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설교는 요즈음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강해설교가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둔 구속사적 강해설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설교를 들었을 때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떤 말보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진리에 평안을 얻고 만족을 얻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며, 그가 우리의 구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진작 먼저 믿어야할 유대인들이 도리어 시기, 질투, 작당하여 복음을 배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누리고 무엇을 좀 안다는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합니다.

아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어야 참으로 아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모르는 실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이 복음을 배척할수록 이방인에게 더욱 크게 확신되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끝으로"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시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교통의 요지에 있으나 베뢰아는 샛길로 들어간 곳에 위치했기에 다소 지역적으로 뒤 떨어진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 중앙에 산다고 더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도 아닙니다.

정말 고상한 인격과 고상한 마음을 가진 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자들입니다. 지방사람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또 무슨 학식과 학문이 많다고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권세와 물질보다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고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 가능합니다. 유럽사람 또는 서양사람들이 처음부터 고상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첨략자들이었고 바이킹족 해적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세상의 지혜를 좋아하고 세속적이고 음탕한 민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에 속속 증거되어 전체 유럽이 말씀으로 변화되고 결국은 또 다시 종교개혁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도 오직 성경을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고상한 인격과 지혜를 얻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국민학교도 못나온 사람이지만 성경 한 권을 철저히 배우고 익히고 연구하여 미합중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모두들 과외 공부를 시키지만 참으로 성수주일하여,성경을 배우고 말씀을 듣는 일에는 부모들 마저도 무관심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직 연륜도 어리고 모이는 수도 많지는 못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고상한 교회, 고상한 인격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인격은 바로 성경을 상고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전개 될 때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교회로 그리고 성도들로 성숙되어 질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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