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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자들의 사명(행11:19-30절)

대산지기 2007. 2. 8. 10:34
제자(弟子)들의 사명(使命)
행11:19-30절, 350.355.493장.*

우리가 크리스챤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이며, 구주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모습이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2: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이니…”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 속에 예수의 마음을 갖는 것이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고 한 구절을 출발점으로,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에 앞서 우리는 이 본문의 전후관계를 잘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지난 단락에서 살펴 본대로 베드로의 설교와 간증을 들은 다른 사도들과 형제들이 내린 결론은

18절의 말씀처럼"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주선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 성도들의 교만과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심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복음의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이방인들을 상대로 교회를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모교회에서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해서 사역하게 되었는데, 교회가 자라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해서 보냈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늘 제가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건은 그저 교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며 성령께서 친히 간섭 하시고 감동 감화하는 성령의 행전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지만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거듭거듭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의 간섭과 역사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선 19절 말씀을 살펴보면 스데반의 순교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존폐의 위기에 도달했고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이방나라. 헬라문화의 도시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실제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탈출이었고, 어쩌면 정권과 유대교권에 나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홍미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를 통해서 도리어 복음이 땅 끝까지 가는 동력을 부여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무사안일주의 그리고 이방 선교에 무심했던,성도들에게 박해를 통해서 전도와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하셨습니다. 이 본문에 열거된 도시를 보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 등이었습니다. 베니게 지방은 지중해 연안지방으로서 두로와 시돈 등의 도시를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시돈은 지중해의 최대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상업과 산업의 중심도시로서 특히 유리제품의 생산이 B.C 2세기부터 발전되었습니다. 시돈은 베니게 사람들의 항해 상업, 식민지 산업 등의 활동무대였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시돈은 베니게 우상 숭배의,
온상으로서 악명이 높았습니다(사23장).

또한 이방적 물질주의(마11:21-22절)의 중심이었습니다. 또 구브로는 오늘날의 사이프러스(Cypruis)란 큰 섬으로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또한 안디옥은 당시 인구 50만을 헤아리는 로마제국의 제3의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일찍이 헬라의 실루시아 왕조의 궁전이 있었고, 그후 로마의 통치시대는 수리아 총독이 주재하였습니다.

안디옥은 세계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의 흐름을 살피면서 박해를 피하여 다른 지역, 다른 나라로 간 것은 개인적으로는 아픔이었고, 불행한 듯 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게 되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실패로 보여지는 것도 필경은 우리로 하여금 연합하여 유익되게 하시는,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의 영적인 시선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기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오늘의 고통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며, 오늘의 슬픔과 괴로움도 모두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박해 받는 것은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 박해 때문에 신앙이 더욱 뜨거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의 고통과 실패가 당장은 가슴앓이를 하지만 후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증표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때문에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좌절 해서는 안됩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고난이 많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을 알았기에 복음을 받기에 알맞은 텃밭을 일구었고, 고통의 시련을 겪어 보았기에 선교사들이 오대양 육대주에 어디를 가도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이 어디를 가도 먼저 교회부터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큰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말씀은,예루살렘에서 피난온 성도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이방인에 대한 선입견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구브로와 구레네에 있던 이름없는 성도들이 안디옥에 와서 헬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사실을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도들도 아닐 뿐더러, 평신도 가운데도 이름을 거명 할 정도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 없는 몇몇 사람들의 전도 활동은 선교의 요충지인 안디옥을 새롭게 변하게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운동은 반드시 위대한 인물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름없는 전도자의 전도를 받아 믿게된 사람들이 대부분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에게 준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절) 사실 전도는 비유컨대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져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전도 일은 내가 할 일 다하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할 일이 아니고,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해외 선교나 국내 전도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구령운동은 시각을 다투고 촉각을 다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웃의 전도, 가정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생명의 귀중성을 안다면 전도를 연기하는 것은 물에 떠내려 가는 사람이나, 불타는 집에 있는 사람보고 기회 봐서 구하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 보다 더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순종하며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말씀에 유의해 봅시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성경 기록자 누가의 관심사는 전도자들의 전도 행위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국 주님의 능력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할 때 권능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그렇습니다.

항상 주님의 일은 주님이 개입하시고 축복하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든지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봉사할 때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권능의 손길이 우리와 할께 하실 것을 바로 보아야만 합니다.

결국 일은 우리가 한다 할찌라도 그 일을 참으로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믿는 신앙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손에 쓰임받는 도구라는 인식이 있어야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만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했고, 그리고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의 첫번 메시지는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마음의 목적을 세워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생활을 하라는 설교였습니다.

단단히 마음을 가지고 주와 더불어 살아야 신앙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경기록 대로 보면 바나바는 천성이 착하였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파송한 교역자로는 적격이었습니다. 그는 다소에 가서 바울을 모시고 와서 l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많은 무리를 모아 놓고 이른바 사경회를 계속했습니다. 사경회는 교회 성장의 원인이었습니다. 오늘날 제자훈련이란 것도 사경회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한국교회의 성장의 비결에는 도시나 농촌교회 할 것 없이.사경회를 많이 열고, 그 사경회를 통해서 교회가 든든히 자라게 된 것은 세계 교회 앞에 자랑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경회 운동이 일어나야 될 줄 믿습니다. 최근(最近)에는 부흥회(復興會) 운동이 성경과는 거리가 먼 만담, 재담으로 사람의 귀만을 즐기게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운동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가 든든히 서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일년 동안 말씀을 가르쳤기에 비로소 그 제자들이 크리스챤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크리스챤이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믿을 때 크리스챤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훈련되어진 사람이 군인입니다. 오늘날 산업전선에서 훈련되지 않은 사람은 쓰지 않습니다. 복음운동에 있어서 말 그대로 그리스도인, 곧 크리스챤은 말씀으로 무장되고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크리스챤으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곳 어느 장소에든지 크리스챤이라는 것을 명백히 말해야 합니다. 크리스챤이기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제가 부사관은 대대장님과 부사관들이 회식을 하다가 대대장님이 술을 마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사관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회식 자리는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부대 선배 부사관들은 그리고 동료들은 분위 파악을 못한다고, 그 사람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대대장은 대대장 명령에 숭종하지 않는다고 그 행위를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나중에 떠나면서 그 사람이 진짜 크리스챤이란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크리스챤으로 불려지는 것을 감사하며 기뻐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크리스챤은 위대한 이름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십자가의 군병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큰 일이란 곧 전도입니다. 전도는 영적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정말 살아있는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말씀을 따라 살 뿐 아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크리스챤으로 불려지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장소 어느 시기에도 자기 자신에게 불 이익이 미치드라도 담대하게 크리스챤임을 밝힐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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