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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크리스천의 삼대 축복. (창30:25-36절).

대산지기 2008. 2. 28. 15:24
크리스천의 삼대 축복
창30:25-36, 410. 411.483장&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현미경적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망원경적 방법입니다.

현미경적인 방법은 성경의 글자 하나 하나에 있는 깊고 오묘한 뜻을 찾고 문자를 분석하는 것이나 망원경적인 방법은 마치 비행기에서 또는 높은 산에서 시가지를 바라보면서 그 전체의 윤곽과 산세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본문은 주제도 여럿이 있고 그리고 매우 복잡한 사건이 몇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좀더 넓은 시각에서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건설과 인류의 구원 운동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격이나 신앙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서는 도무지 무엇하나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강권적인 은총을 통해서 야곱에게 구속사의 핵심에 서도록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못된 성품과 사기성 그리고 그의 이중인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아주 구체적이란 사실입니다.

첫째로, 야곱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와서 구체화되었던 것입니다. 이 본문 중에 창 30:1-13절을 보면 정말 복잡합니다. 야곱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은 서로 자녀를 더 얻으려는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결혼 초기부터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사랑하고 총애했기 때문에 두 여인 사이에는 남편을 독차지하려는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레아는 동생보다 못났다는 콤플렉스와 남편의 사랑이 자기보다 라헬에게 쏠리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실 이런 가정적인 문제와 불화는 이미 일부일처의 원리를 무시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여간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시기와 질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자녀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본래 두 여인 모두 아이를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사랑을 잘 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먼저 은혜와 긍휼을 주셔서 태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등 네 자녀를 낳았습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만 바로 넷째 아들 유다가 장차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은 라헬이 더 받았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레아가 더 받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레아는 당당해졌고, 반면에 라헬은 초조하고 안절부절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장면부터 오늘 본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라헬이 언니 레아를 시기 질투하는 것이 극에 달해서 남편 야곱에게 창30:1절에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겠노라”고 극언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여자가 자녀를 가져야 입지가 서는데 레아가 아들 넷을 낳는 동안 라헬은 아무 소식이 없으니 자식을 안 낳으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라헬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야곱의 대답은 정말 그의 삶과는 다르게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대답을 했습니다. 창30:2절에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라헬은 비상대책으로 자기 여종인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서 단과 납달리라는 아들을 얻게 했습니다. 옛날에는 여종은 주인의 도구로쓰였으니 만큼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되자 레아도 가만있을 수 없어 자기 여종 실바를 주어서 갓과 아셀 이라는 두 아들을 추가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라헬을 긍휼히 여겨서 태를 여시고 요셉과 베냐민을 낳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두 여인 레아와 라헬의 시기 질투를 통해서 열두 아들이 생산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실은 야곱가의 복잡한 가정사인 듯 하지만 사실 이 본문을 보면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시켜 주시는 축복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장차 민족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와서 12아들이 되어 큰 민족을 이룰 차비를 했습니다. 이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큰 틀이 잡혀집니다. 이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죄된 본성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을 따라서 성결케 되고 있음을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즉각적이 아닙니다. 이 본문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의 축복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3대째에 가서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도 반드시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축복이며 기도하는 그 자체가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겸손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어떠함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족한 것을 통해서도 실수와 죄악까지 반전시켜서 하나님의 나라건설을 위해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 자체가 축복이요, 성도가 된 것 그 자체가 축복이요,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 축복이요,

찬송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축복인 줄 알아서 범사에 감사 할 수 있는 성도의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앞서 인용했지만 야곱은 자식이 없어 불평하는 라헬을 향해서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또 22-24절에는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드라”고 말씀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이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녀 많은 집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품밖에 나가면 자식이 제멋대로 저 하고 싶은 대로 가버리니 속이나 썩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녀는 낳아서 기르고, 교육시키고, 결혼시키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부모는 평생 신경쓰고 돌봐야 한 것이 한국사회의 형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녀가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것이지 우리가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식으로 키워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교훈과 훈계로 키워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녀입니다. 속썩이는 자녀도 애물단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으로 준 선물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잘 교육시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본성적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부모는 하나님의 축복인 자녀를 하나님의 뜻에 합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일꾼으로 키우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국가나 교회만 큼 또 다른 권위 있는 조직이 가정입니다.

좋은 사회 좋은 나라 건설은 바로 좋은 가정건설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가정이 PC 방이니, 전자오락, 음란 비디오, 러브호텔, 등 도처에 이러한 음침한 곳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으니 이러한 곳으로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가정의 아름다움이 깨어져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땀흘려 일해야하는데 밤을 새워 컴퓨터 게임에 빠져 바보가 되어버리고 심지어 죽음을 자처하는 사례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니 사회와 국가가 바로 될 수 있습니까?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으로 주신 선물인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경건한 가정을 만들어갈 때 밝은 사회 건강한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물질의 축복입니다. 물질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알아야합니다. 적은 물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큰 물질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도 내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큰 물질을 가진 자는 큰 청지기요, 작은 물질을 관리하는 자는 작은 청지기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돈 버는 일에 탐욕을 가진 두 고단수의 맞대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반과 야곱의 머리싸움입니다. 하기는 라반도 야곱도 사업의 수완가입니다. 두 사람 모두 사기성이 농후한 사람들입니다.

이 둘 모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유익을 챙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찍이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두 딸을 팔아넘긴 셈입니다. 그래서 14년 동안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당대의 사기사가 또 다른 사기사에게 걸려든 셈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역전되어 야곱의 고단수의 계략에 라반이 녹아난 셈입니다. 야곱은 라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아롱진 것 즉 얼룩이와 검은 것은 모두 자기 것이 되고 흰 것만 외삼촌 라반의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양과 염소가 새끼를 배면 살구나무, 버드나무, 신품나무의 푸른 가지를 꺽어 껍질을 벗겨 흰무늬를 내고 그 벗긴 가지를 양떼가 물먹는 개천 물구유에 세워서 그 물을 먹게 하면 아롱지고 얼룩들이 나오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그렇게 되는지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야곱의 계략으로 라반의 재산은 엄청나게 야곱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요즘 용어를 쓰면 회사 돈을 빼돌려 비 자금을 조성한 셈입니다.

야곱은 부정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재산마저도 형을 만났을 때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뇌물로 썼고 그가 일찍이 하나님과 약속했던 십일조를 바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 그 자체로 본다면 야곱이 재물을 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창31:9-13절을 보면 이것은 꿈에 하나님께서 지시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과의 약속을 지키고 그를 벧엘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로 재산을 모으게 한 것입니다.

이 성경이 말하고자 한 것은 야곱의 사기성이나 재물에 대한 탐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을 위해서, 또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재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물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결국 이 성경에서 세 가지 축복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축복이요, 둘째는,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축복이요, 셋째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지혜 스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로 허락하신 축복을 감사하면서 영광 돌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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