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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원의 하나님. (창28:10-22절),
대산지기
2008. 2. 28. 15:24
구원의 하나님
창 28:10-22, 84.85.542장&
우리는 오늘 읽은 성경에서 사기를 쳐서 형의 재산을 다 빼앗고 형의 분노와 살해를 두려워한 나머지 멀리 해외로 도피하는 한 범죄자이며 도망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자의 이름은 곧 야곱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인감도장을 이조하고 허위로 서류를 만들어서 형의 재산을,
법적으로 빼앗았으나 들통나서 형의 복수와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해외로 도망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범죄자요 도망자인 야곱의 파란만장한 그의 해외 도피행각을 그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비록 범죄자이고 도망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의 초점은 도망가는 야곱이 아니고 도망가는 야곱을 낚아 챙기고 그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시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음을 보여주시고, 그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초점은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본래 큰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를 돌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죄로 타락했고 영원히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크고도 웅장한 계획이 있었는데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에게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서 그를 중보자로 해서 인생을 구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준비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정의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그 가정이 큰 민족과 국가를 이루고 그 민족을 하나님의 계시의 당사자로 삼은 것입니다. 바로 그 과정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이르는 가족사가 곧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높은 산에서 내려보듯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상대가 비록 그릇이 부족하고 연약해 자격 미달의 수준이라고 해도, 바로 자격미달, 수준미달 함량미달의 사람을 통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또는 하나님은,
그의 택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본문의 흐름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보다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야곱은 눈먼 아비를 속이며, 털장갑을 끼고 형 에서로 사기를 쳤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송두리째 빼앗았습니다. 이미 이전에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샀습니다. 형. 에서는 장남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계산된 순서를 밟아 가는 영리한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러니 형. 에서는 야곱을 죽여야 분이 풀렸을 것입니다. 형이 야곱을 죽이려고 준비했을 때 부모들은 야곱을 격리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리브가의 오빠가 사는 밧단 아람으로 도피를 주선합니다. 이삭도 리브가도 야곱 자신도 형. 에서의 낯을 필하면 살아남을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부모의 집에서 떠났기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형의 얼굴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형의 얼굴을 피해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야곱은 형님에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난생처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곁을 떠나 유랑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집을 떠나던 날 형의 눈을 피해 황급히 개나리 봇짐 하나만을 달랑 메고 도망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과 불신 결혼은 절대하지 말라는 신신당부 그리고 어머니의 울먹임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리고 형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그 불안과 초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 집을 목표로 해서 간다고는 하나 야곱의 장래는 암담하고 참담했습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허허로움, 깊은 절망감과 무서운 고독, 벧엘 광야에서 하늘을 지붕 삼고 돌 하나 베개로 하여 누워서 잠을 청하는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야곱은 별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사기 쳐서 재물을 빼앗은 것이 이처럼,
혹독한 시련과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는 형의 얼굴을 피했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불안과 초조는 더했습니다. 이만큼 집을 멀리 떠나 벧엘 광야까지 왔으니 누구하나 좇아오는 사람이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자, 도망자의 심리는 누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좇기는 심정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깜빡 잠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계단 곧 사닥다리가 뻗쳐 있고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장차 야곱에게 주실 축복을 말해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신비롭고 놀라와서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처음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창28:16절)라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고백은 실상 성경에서 위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들 상입니다. 인생은 아무 곳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손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 집안에만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가정, 자기 지역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우주적인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날 교회당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직장에서나, 집안에서나 질퍽한 시장에서나, 전투가 치열한 전쟁터에서나, 복잡한 산업현장이나 생존경쟁으로 아귀다툼을 하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질 때만이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상을 극복하고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주일날 오전에 교회당(敎會堂)에서만 잠깐 뵙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어떤 시간에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철저한 신전의식(神殿意識)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일은 없습니다. 요즘 성도들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온지 어언간 110여 년이 흘렀습니다. 어떤 가정은 3.4대째 신앙의 가정이고 어떤 가정은 2대째 신앙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할머니의 어머니의 신앙이 곧 내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내 아내가 예수 잘 믿으니 천당 갈 때 설마 나를 모른다고 하겠는가 라고 농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물론 부모의 신앙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조부의 신앙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개인적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됩니다. 내 자신이 인격적인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내 자신이 인격적인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보면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28:13절)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듯이 이삭에게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이시고 지금 야곱에게도 찾아오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변화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부터입니다. 여러 분은 언제 어디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처음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만났습니까? 물론 개인에 따라서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며 교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대로 기독교 가정의 자녀라고 자만하거나 자랑하기보다는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할 때만이 생명력 있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멀리 바라보고 그 사람의 얼굴 이름을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아는 것을 개인적으로 만나 함께 식사를 나누며 손을 잡고 자기 소개를 하고 자기의 비전과 이상을 서로 나누고 자기의 과거를 다 말하는 진정한 개인적인 만남이 있을 때만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멀찍이 따른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의 만남,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생활의 첫 출발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승리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야곱은 범죄자요, 도망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떤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오시고 그를 만나주시고 위로하시고 축복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이 성경은 인간의 연약과 부족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은 죄악대로 갚으신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대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전부를 드려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주님 좋아하시는 것만을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위로와 축복이 구체적이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에 감격해서 우리의 헌신도 매우 구체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돌 베개 했던 돌을 성전 지을 때 모퉁이 돌로 드리겠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말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지금 만나십시오 마음 문을 열고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은 천하장사도 열 수 없습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로도 열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실 때 본인이 스스로 열려고 할 때 마음의 문은 열려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잘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사품으로 하늘 문을 여시고 풍성하게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을 필요 적절하게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산업 위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 28:10-22, 84.85.542장&
우리는 오늘 읽은 성경에서 사기를 쳐서 형의 재산을 다 빼앗고 형의 분노와 살해를 두려워한 나머지 멀리 해외로 도피하는 한 범죄자이며 도망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자의 이름은 곧 야곱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인감도장을 이조하고 허위로 서류를 만들어서 형의 재산을,
법적으로 빼앗았으나 들통나서 형의 복수와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해외로 도망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범죄자요 도망자인 야곱의 파란만장한 그의 해외 도피행각을 그리려는 목적이 아니라 비록 범죄자이고 도망자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의 초점은 도망가는 야곱이 아니고 도망가는 야곱을 낚아 챙기고 그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시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음을 보여주시고, 그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초점은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본래 큰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이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를 돌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죄로 타락했고 영원히 소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크고도 웅장한 계획이 있었는데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에게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서 그를 중보자로 해서 인생을 구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준비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정의 선택이 필요했습니다. 그 가정이 큰 민족과 국가를 이루고 그 민족을 하나님의 계시의 당사자로 삼은 것입니다. 바로 그 과정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이르는 가족사가 곧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높은 산에서 내려보듯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상대가 비록 그릇이 부족하고 연약해 자격 미달의 수준이라고 해도, 바로 자격미달, 수준미달 함량미달의 사람을 통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또는 하나님은,
그의 택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본문의 흐름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보다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야곱은 눈먼 아비를 속이며, 털장갑을 끼고 형 에서로 사기를 쳤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송두리째 빼앗았습니다. 이미 이전에 장자의 기업을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샀습니다. 형. 에서는 장남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계산된 순서를 밟아 가는 영리한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러니 형. 에서는 야곱을 죽여야 분이 풀렸을 것입니다. 형이 야곱을 죽이려고 준비했을 때 부모들은 야곱을 격리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리브가의 오빠가 사는 밧단 아람으로 도피를 주선합니다. 이삭도 리브가도 야곱 자신도 형. 에서의 낯을 필하면 살아남을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부모의 집에서 떠났기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형의 얼굴을 피할 수는 있었으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형의 얼굴을 피해가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야곱은 형님에게 체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난생처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곁을 떠나 유랑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집을 떠나던 날 형의 눈을 피해 황급히 개나리 봇짐 하나만을 달랑 메고 도망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과 불신 결혼은 절대하지 말라는 신신당부 그리고 어머니의 울먹임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리고 형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그 불안과 초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 집을 목표로 해서 간다고는 하나 야곱의 장래는 암담하고 참담했습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허허로움, 깊은 절망감과 무서운 고독, 벧엘 광야에서 하늘을 지붕 삼고 돌 하나 베개로 하여 누워서 잠을 청하는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야곱은 별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사기 쳐서 재물을 빼앗은 것이 이처럼,
혹독한 시련과 대가를 지불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는 형의 얼굴을 피했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불안과 초조는 더했습니다. 이만큼 집을 멀리 떠나 벧엘 광야까지 왔으니 누구하나 좇아오는 사람이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자, 도망자의 심리는 누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좇기는 심정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깜빡 잠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을 잇는 계단 곧 사닥다리가 뻗쳐 있고 그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장차 야곱에게 주실 축복을 말해주셨습니다. 너무나도 신비롭고 놀라와서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처음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도다“(창28:16절)라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고백은 실상 성경에서 위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들 상입니다. 인생은 아무 곳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손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 집안에만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가정, 자기 지역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은 계시지 아니한 곳이 없는 우주적인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날 교회당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직장에서나, 집안에서나 질퍽한 시장에서나, 전투가 치열한 전쟁터에서나, 복잡한 산업현장이나 생존경쟁으로 아귀다툼을 하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질 때만이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상을 극복하고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주일날 오전에 교회당(敎會堂)에서만 잠깐 뵙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어떤 시간에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철저한 신전의식(神殿意識)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개인적으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일은 없습니다. 요즘 성도들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온지 어언간 110여 년이 흘렀습니다. 어떤 가정은 3.4대째 신앙의 가정이고 어떤 가정은 2대째 신앙을 가진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할머니의 어머니의 신앙이 곧 내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내 아내가 예수 잘 믿으니 천당 갈 때 설마 나를 모른다고 하겠는가 라고 농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말입니까?
물론 부모의 신앙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조부의 신앙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개인적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됩니다. 내 자신이 인격적인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내 자신이 인격적인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보면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창28:13절)라고 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듯이 이삭에게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이시고 지금 야곱에게도 찾아오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변화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부터입니다. 여러 분은 언제 어디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처음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만났습니까? 물론 개인에 따라서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으며 교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대로 기독교 가정의 자녀라고 자만하거나 자랑하기보다는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할 때만이 생명력 있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멀리 바라보고 그 사람의 얼굴 이름을 아는 것은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아는 것을 개인적으로 만나 함께 식사를 나누며 손을 잡고 자기 소개를 하고 자기의 비전과 이상을 서로 나누고 자기의 과거를 다 말하는 진정한 개인적인 만남이 있을 때만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멀찍이 따른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일의 만남,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생활의 첫 출발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승리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야곱은 범죄자요, 도망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떤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오시고 그를 만나주시고 위로하시고 축복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이 성경은 인간의 연약과 부족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지은 죄악대로 갚으신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대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전부를 드려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주님 좋아하시는 것만을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위로와 축복이 구체적이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에 감격해서 우리의 헌신도 매우 구체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돌 베개 했던 돌을 성전 지을 때 모퉁이 돌로 드리겠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말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지금 만나십시오 마음 문을 열고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은 천하장사도 열 수 없습니다.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로도 열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실 때 본인이 스스로 열려고 할 때 마음의 문은 열려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잘 공경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사품으로 하늘 문을 여시고 풍성하게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을 필요 적절하게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산업 위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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