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발꿈치를 잡고 출생한 야곱. (창25:19-26절)
대산지기
2008. 2. 28. 15:23
발꿈치를 잡고 출생한 야곱
창25:19-26, 408.410.411장*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결혼한지 2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20년간이나 잉태치 못하던 리브가의 고통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자식을 생산치 못하는 여인은 수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간구하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타르”는 예배에서 향을 피우다“란 의미를 가진 어근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에서 ‘기도한다”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향연과 같이 여호와께 올라가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행10:4, 계8:1-5절)
성경은 역사상 위대한 신앙 위인들의 삶을 증거 하는데 있어서 어떤 한 단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흑과 백이 있고 빛과 어두움이 있듯이, 어떤 사람에게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는가하면 그 사람의 실수와 단점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신앙적으로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요구합니다. 그 반면 우리의 부족함도 알고 위로도 해줍니다. 본문에 증거 되고 있는 야곱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야곱은 원래부터 위대한 신앙 계승자와 족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계교를 더 따랐던 육신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집요하게 노력한 반면에 그 과정에서 많은 실수와 죄를 범한 자가 야곱입니다. 출생과정에서부터 이미 야곱의 범상치 않은 인생여정이 예고되었습니다. 우리는 발꿈치를 잡고 출생한 야곱의 성품을 살펴보면서 신앙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상대의 발꿈치를 잡는 일은 불 의한 행동의 상징입니다. 1)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발은 인체의 기둥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뼈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발꿈치에는 ‘아킬레스건“이라는 예민한 힘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앉은뱅이로 만들고자 아킬레스건을 상하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특히 운동선수들은 대단히 민감합니다. 축구선수, 배구선수, 테니스선수, 무용수(발레), 자기 보다 잘하는 선수가 있으면 아킬레스건을 손상시키는 예가 있다는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발은 곧 인간행동 의지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꿈치를 잡는다는 것은 타인의 의지와 행동을 훼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망과 계획을 깨뜨리는 죄를 일컬어 발꿈치를 잡는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2) 발꿈치를 잡는 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는 것은 사단의 악한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단은 남을 속이고 간교한 술수로 남의 것을 빼앗아 약탈하는 행위를 다반사로 합니다.
창 세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인간의 희망을 깨뜨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거짓된 것으로 변질시키고 진리를 왜곡시킴으로 하나님의 발꿈치를 잡아 하나님의 선하신 구속섭리를 훼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뱀처럼 몰래 다가가 그리스도의 발꿈치도 깨문 자가 사단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므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망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타인의 발꿈치를 잡는 속성이 나에게 없는지 돌아 보셔야합니다. 질투와 시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마음, 타인의 성공과 승리를 훼방하는 마음, 이 모든 비열한 마음이 곧 발꿈치를 잡으려는 야곱의 속성이요 사단의 속성입니다.
2, 야곱은 타인의 발꿈치를 잡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1) 부당한 과정으로 목적을 이루려 했습니다. “야곱‘이란 아름은 ”발뒤꿈치를 붙든 자’를 뜻하며, 여기서 “속이는 자”, “빼앗는 자”라는 의미가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란 아름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황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간교하고 속임 수 많은 그의 생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점은 야곱의 근성입니다. 야곱은 매사에 목표를 성취하고 쟁취하려는 집념과 기회를 포착하면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의 발꿈치를 잡는 것,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만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과정도 아주 중요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성취하고서는 결과로써 그 과정을 정당화시키려합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 가운데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말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풍조에 물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정당한 과정 없이는 훌륭한 결과가 산출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심은 대로 거두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게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는 교활하고 간사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배고픈 때에 팥죽 한 그릇을 주고 형에서 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27-34절), 또한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형에게 돌아갈 축복 권을 탈취했습니다. 간교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약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도를 걷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은 자가 결국은 비극적인 결과를 겪는 것처럼, 속이는 삶을 영위한 야곱은 그 결과를 감당해내야 했습니다. 그는 후반기 생애의 대부분을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했고, 빗단 아람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만년에 그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뼈아픈 고통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외삼촌 집으로 도망할 때 헤어진 어머니와는 마지막 생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는 일은 아예 삼가야 합니다.
3, 성도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붙들고 살아야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으로 볼 때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출생했다는 성경의 증언 속에는 궁극적인 복음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에서의 힘을 의존하여 생명을 얻은 것처럼,
죄인 된 인류는 중 보자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잡지 못했다면 출생하지 못하고 사상아가(죽은 아이) 됐을 것입니다. 그가 에서의 발꿈치를 잡게 된 것은 곧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야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 동안에 그리스도의 대속 권능과 그 은혜를 붙잡아야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구원진리의 모형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절), 는,
성경의 예언대로 사단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사단의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사망권세를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발을 붙잡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을 소유하게됩니다.
영생 얻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발뒤축을 잡고 그 발걸음을 따르는 길 외엔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절), 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형에서를 따라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가운데 야곱에게 축복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이삭이 리브가의 잉태 못함을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여 기도 응답을 받아 리브가가 잉태되었습니다.
창25:22-23절에서 ‘아이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하였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대 전통에 따라 장자에게 축복하고자 한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자기가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기에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서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행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의 뜻으로 이루려 하다가 가정이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려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자식을 잃지 안으려고 친정오빠의 집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이삭을 설득시켜서 에서 모르게 도망치게 했습니다. 이때 자식과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되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순리 되로 진행될 일을 조급하게 진행하다가 심은 대로 온갖 고난을 값으로 치루게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웃의 발꿈치를 잡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이 불 신세상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생명과 구원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붙잡아 의와 평강 가운데 복된 삶을 보장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25:19-26, 408.410.411장*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결혼한지 20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20년간이나 잉태치 못하던 리브가의 고통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자식을 생산치 못하는 여인은 수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간구하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타르”는 예배에서 향을 피우다“란 의미를 가진 어근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에서 ‘기도한다”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향연과 같이 여호와께 올라가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행10:4, 계8:1-5절)
성경은 역사상 위대한 신앙 위인들의 삶을 증거 하는데 있어서 어떤 한 단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흑과 백이 있고 빛과 어두움이 있듯이, 어떤 사람에게서 본받을 만한 점이 있는가하면 그 사람의 실수와 단점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신앙적으로 훌륭한 사람의 모습을 요구합니다. 그 반면 우리의 부족함도 알고 위로도 해줍니다. 본문에 증거 되고 있는 야곱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야곱은 원래부터 위대한 신앙 계승자와 족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계교를 더 따랐던 육신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집요하게 노력한 반면에 그 과정에서 많은 실수와 죄를 범한 자가 야곱입니다. 출생과정에서부터 이미 야곱의 범상치 않은 인생여정이 예고되었습니다. 우리는 발꿈치를 잡고 출생한 야곱의 성품을 살펴보면서 신앙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상대의 발꿈치를 잡는 일은 불 의한 행동의 상징입니다. 1) 상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행동입니다. 발은 인체의 기둥입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뼈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발꿈치에는 ‘아킬레스건“이라는 예민한 힘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앉은뱅이로 만들고자 아킬레스건을 상하게 하는 일도 있습니다.
특히 운동선수들은 대단히 민감합니다. 축구선수, 배구선수, 테니스선수, 무용수(발레), 자기 보다 잘하는 선수가 있으면 아킬레스건을 손상시키는 예가 있다는 예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발은 곧 인간행동 의지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꿈치를 잡는다는 것은 타인의 의지와 행동을 훼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 타인의 희망과 계획을 깨뜨리는 죄를 일컬어 발꿈치를 잡는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2) 발꿈치를 잡는 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는 것은 사단의 악한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단은 남을 속이고 간교한 술수로 남의 것을 빼앗아 약탈하는 행위를 다반사로 합니다.
창 세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인간의 희망을 깨뜨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거짓된 것으로 변질시키고 진리를 왜곡시킴으로 하나님의 발꿈치를 잡아 하나님의 선하신 구속섭리를 훼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뱀처럼 몰래 다가가 그리스도의 발꿈치도 깨문 자가 사단입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므로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망치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타인의 발꿈치를 잡는 속성이 나에게 없는지 돌아 보셔야합니다. 질투와 시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마음, 타인의 성공과 승리를 훼방하는 마음, 이 모든 비열한 마음이 곧 발꿈치를 잡으려는 야곱의 속성이요 사단의 속성입니다.
2, 야곱은 타인의 발꿈치를 잡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1) 부당한 과정으로 목적을 이루려 했습니다. “야곱‘이란 아름은 ”발뒤꿈치를 붙든 자’를 뜻하며, 여기서 “속이는 자”, “빼앗는 자”라는 의미가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란 아름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황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간교하고 속임 수 많은 그의 생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점은 야곱의 근성입니다. 야곱은 매사에 목표를 성취하고 쟁취하려는 집념과 기회를 포착하면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의 발꿈치를 잡는 것,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만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과정도 아주 중요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성취하고서는 결과로써 그 과정을 정당화시키려합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 가운데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말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풍조에 물들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정당한 과정 없이는 훌륭한 결과가 산출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2) 심은 대로 거두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게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는 교활하고 간사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배고픈 때에 팥죽 한 그릇을 주고 형에서 에게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습니다.(27-34절), 또한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형에게 돌아갈 축복 권을 탈취했습니다. 간교한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약탈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도를 걷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은 자가 결국은 비극적인 결과를 겪는 것처럼, 속이는 삶을 영위한 야곱은 그 결과를 감당해내야 했습니다. 그는 후반기 생애의 대부분을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했고, 빗단 아람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고난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은 만년에 그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는 뼈아픈 고통도 겪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외삼촌 집으로 도망할 때 헤어진 어머니와는 마지막 생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잡는 일은 아예 삼가야 합니다.
3, 성도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붙들고 살아야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으로 볼 때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출생했다는 성경의 증언 속에는 궁극적인 복음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라 에서의 힘을 의존하여 생명을 얻은 것처럼,
죄인 된 인류는 중 보자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잡지 못했다면 출생하지 못하고 사상아가(죽은 아이) 됐을 것입니다. 그가 에서의 발꿈치를 잡게 된 것은 곧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야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 동안에 그리스도의 대속 권능과 그 은혜를 붙잡아야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구원진리의 모형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절), 는,
성경의 예언대로 사단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사단의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사망권세를 깨뜨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발을 붙잡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생명을 소유하게됩니다.
영생 얻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발뒤축을 잡고 그 발걸음을 따르는 길 외엔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절), 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올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형에서를 따라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채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가운데 야곱에게 축복을 베푸셨을 것입니다. 이삭이 리브가의 잉태 못함을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여 기도 응답을 받아 리브가가 잉태되었습니다.
창25:22-23절에서 ‘아이들이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하였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 수 없었습니다. 고대 전통에 따라 장자에게 축복하고자 한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자기가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기에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서 인간적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진행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의 뜻으로 이루려 하다가 가정이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이려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자식을 잃지 안으려고 친정오빠의 집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이삭을 설득시켜서 에서 모르게 도망치게 했습니다. 이때 자식과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되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순리 되로 진행될 일을 조급하게 진행하다가 심은 대로 온갖 고난을 값으로 치루게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웃의 발꿈치를 잡아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것이 불 신세상의 삶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생명과 구원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붙잡아 의와 평강 가운데 복된 삶을 보장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