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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브라함의 간절한 위하여 기도, (창18:22-33절),
대산지기
2008. 2. 28. 15:21
아브라함의 간절한 위하여 기도
창18:22-33절,480.482.505장&
우리는 지나온 2년 동안 너 나 할 것 없이 매우 우울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직장이나 사업에 대한 불투명 때문만 아니라, 어찌하여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온 착한 서민들이 이처럼 경제한파에 시달리고 고통 속에 시달려야 하는 가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불 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불로소득으로 재물을 모으며 정경유착과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쌓아 놓은 사람이 지금이야말로 더 큰 재미를 보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율이 오르고 금리가 오르는 것은 기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되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너무나 그림의 떡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대 다수 국민들이 고통가운데 있을 때 일부계층 사람들은 이 기간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서 흥청망청 쓰고, 도리어 남이야 죽건 말건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국가의 시책이나 경제시책을 비웃고 윤리나 도덕이나 이웃사랑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낙담과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왜 우리처럼 착하고 순한 백성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사는데 왜 하필 우리만 고통을 당하는가 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가진 자들 특히 대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안 하는데 왜 고통은 노동자들이 져야하는가? 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시위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정서와 비슷한 장면이 이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호소한 말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인데 어찌하여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도덕적 쾌락과 불 신앙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는다면 어째서 죄 없는 사람 의인도 함께 망하도록 하는 가라는 것이 오늘 읽은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전후를 살펴보면서 은혜 받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창세기 18장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메시지와 내용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실 위대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계시의 파트너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계시란 마치 커튼을 걷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가려졌던 것을 훤히 알 수 있도록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이른바 종교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력에 대해 말하나 성경 곧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분이므로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실 것에 대한 예고편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잘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온 줄을 모르고 다만 손님을 잘 대접한 것뿐인데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비상한 방법을 통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브라함과 사람 앞에 나타나셨습니까?
그것은 99세인 아브라함과 그리고 90세인 사라의 마음속에 분명히 약속의 씨인 아들 이삭을 주시겠다는 최종의 예언을 주고 그들에게 확신을 더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늙은 부부는 어찌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가 라는 의구심이 있었고 그래서 사라가 냉소까지 한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새로운 능력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의 심판을 알려 주었습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한계를 넘어서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마음 가운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어찌하여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앞서도 말씀했지만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법, 불법, 탈법, 무질서와 혼란이 넘치고 있기에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의심도 일으키게 합니다.
즉 의가 패배 당하고 그릇된 것이 승리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 때우리 마음 가운데는 이런 의심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그것이 정의고 그것이 힘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과거의 제국들을 보면 그들이 그토록 대국이 된 것은 모두가 칼의 힘이었고,
군사적인 솜씨와 용기와 힘의 결과 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나폴레옹 등 그들은 모두가 힘으로 무자비하게 나라들을 탈취한 정복자들입니다. 그들은 승자였지만 정복당한 사람들의 가슴에는“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할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속으로 되뇌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아브라함의 호소가운데 나타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정서 가운데는 양심껏 살아봐야 소용있나? 법대로 하면 손해 보는 거야! 나 혼자 질서를 지킨다고 무엇이 되겠는가? 결국은 나만 손해 보는 거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 탈법 무법으로 사는 사람은 잘도 살고,
성적 도덕적 원리적으로 타락해도 잘만 살고, 장관도하고 국회의원도하고 온갖 나라의 고위 공직에 있는 판에 도대체 정의는 무엇이며 양심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우리들의 정서입니다. 마치 옛날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때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런 때에 우리들의 사명이 무엇이며 책임이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자조 섞인 말이나 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대안과 대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물론 구원도 심판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이 멸망하는 것도 가슴아프지만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멸망 받고 고통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담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며, 기도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기도해야 하지만 마음과 뜻을 합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미스바의 회개(悔改)운동(運動)처럼 먼저 믿는 우리가 진정(眞情)으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진실하지 못하면서 기도 운운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타락의 근거는 바로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의 죄와 타락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부터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있는 심정으로 철저히 회개하는 운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이 당하는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깨닫고 함께 동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대담하게도 하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만일 그 성중에 의인 50명을 발견한다면 그 의인 50명 때문에 용서해 주시렵니까? 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항거하는 것처럼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절), 라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은 도가 지나쳐서 당돌하다 하리만큼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물론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말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만 잘하는 모범적 성도만 아니라 그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고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고뇌하는 영적 지도자요 제사장 적이고 선지자적인 신앙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안과 대책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보수주의자들이 그저 예수 잘 믿고 순종 잘해서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고 평안히 살자는 생각만 하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모세는 민족이 구원받는다면 자기 이름이 생명 책에서 제거되어도 좋다고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한 의식을 가진 지도자였고 나라와 민족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의인을 찾기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당돌하게 5명을 깎아서 45명이면 어찌 하려는 가라고 하나님께 협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의인 40명이면 어찌하겠는가 라고 재조정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허락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30에서, 20, 그리고 20에서 10명으로 내려갔습니다. 만약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다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의인 10명도 없었습니다. 아니 10명은 고사하고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즉 롬3:10이하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있다면 우리의 구속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우리의 중 보자 입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악하고 나는 의롭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는 만백성을 구원하러오신 구세주요, 그 이름을 믿어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의인으로 인정해주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믿을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 뜻대로 생활하면 주님께서 택한 자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내 방법대로 살던 삶을 이제는 주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모든 문제가 주안에서 해결함 받고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18:22-33절,480.482.505장&
우리는 지나온 2년 동안 너 나 할 것 없이 매우 우울하고 불안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직장이나 사업에 대한 불투명 때문만 아니라, 어찌하여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온 착한 서민들이 이처럼 경제한파에 시달리고 고통 속에 시달려야 하는 가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불 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고 불로소득으로 재물을 모으며 정경유착과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쌓아 놓은 사람이 지금이야말로 더 큰 재미를 보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율이 오르고 금리가 오르는 것은 기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되고 일반 서민들에게는 너무나 그림의 떡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대 다수 국민들이 고통가운데 있을 때 일부계층 사람들은 이 기간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서 흥청망청 쓰고, 도리어 남이야 죽건 말건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국가의 시책이나 경제시책을 비웃고 윤리나 도덕이나 이웃사랑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낙담과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왜 우리처럼 착하고 순한 백성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은 여전히 잘 사는데 왜 하필 우리만 고통을 당하는가 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가진 자들 특히 대기업들은 구조조정을 안 하는데 왜 고통은 노동자들이 져야하는가? 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시위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정서와 비슷한 장면이 이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호소한 말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인데 어찌하여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도덕적 쾌락과 불 신앙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는다면 어째서 죄 없는 사람 의인도 함께 망하도록 하는 가라는 것이 오늘 읽은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전후를 살펴보면서 은혜 받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창세기 18장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메시지와 내용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실 위대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계시의 파트너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계시란 마치 커튼을 걷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가려졌던 것을 훤히 알 수 있도록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이른바 종교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력에 대해 말하나 성경 곧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분이므로 아브라함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실 것에 대한 예고편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잘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온 줄을 모르고 다만 손님을 잘 대접한 것뿐인데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비상한 방법을 통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브라함과 사람 앞에 나타나셨습니까?
그것은 99세인 아브라함과 그리고 90세인 사라의 마음속에 분명히 약속의 씨인 아들 이삭을 주시겠다는 최종의 예언을 주고 그들에게 확신을 더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늙은 부부는 어찌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가 라는 의구심이 있었고 그래서 사라가 냉소까지 한 것을 알고 있기에,
그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새로운 능력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의 심판을 알려 주었습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한계를 넘어서 심판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마음 가운데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어찌하여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고 합니다. 앞서도 말씀했지만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무법, 불법, 탈법, 무질서와 혼란이 넘치고 있기에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의심도 일으키게 합니다.
즉 의가 패배 당하고 그릇된 것이 승리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 때우리 마음 가운데는 이런 의심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그것이 정의고 그것이 힘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과거의 제국들을 보면 그들이 그토록 대국이 된 것은 모두가 칼의 힘이었고,
군사적인 솜씨와 용기와 힘의 결과 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나폴레옹 등 그들은 모두가 힘으로 무자비하게 나라들을 탈취한 정복자들입니다. 그들은 승자였지만 정복당한 사람들의 가슴에는“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할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속으로 되뇌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이 아브라함의 호소가운데 나타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정서 가운데는 양심껏 살아봐야 소용있나? 법대로 하면 손해 보는 거야! 나 혼자 질서를 지킨다고 무엇이 되겠는가? 결국은 나만 손해 보는 거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법 탈법 무법으로 사는 사람은 잘도 살고,
성적 도덕적 원리적으로 타락해도 잘만 살고, 장관도하고 국회의원도하고 온갖 나라의 고위 공직에 있는 판에 도대체 정의는 무엇이며 양심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우리들의 정서입니다. 마치 옛날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때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런 때에 우리들의 사명이 무엇이며 책임이 무엇입니까? 언제까지 자조 섞인 말이나 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대안과 대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입니다. 물론 구원도 심판도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이 멸망하는 것도 가슴아프지만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멸망 받고 고통 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담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며, 기도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기도해야 하지만 마음과 뜻을 합해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미스바의 회개(悔改)운동(運動)처럼 먼저 믿는 우리가 진정(眞情)으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진실하지 못하면서 기도 운운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타락의 근거는 바로 종교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의 죄와 타락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부터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있는 심정으로 철저히 회개하는 운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이 당하는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깨닫고 함께 동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대담하게도 하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만일 그 성중에 의인 50명을 발견한다면 그 의인 50명 때문에 용서해 주시렵니까? 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항거하는 것처럼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나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절), 라고 했습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은 도가 지나쳐서 당돌하다 하리만큼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물론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말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만 잘하는 모범적 성도만 아니라 그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고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고뇌하는 영적 지도자요 제사장 적이고 선지자적인 신앙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안과 대책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보수주의자들이 그저 예수 잘 믿고 순종 잘해서 이 세상에서 복 많이 받고 평안히 살자는 생각만 하고 있다면 문제입니다. 모세는 민족이 구원받는다면 자기 이름이 생명 책에서 제거되어도 좋다고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한 의식을 가진 지도자였고 나라와 민족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구체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의인을 찾기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당돌하게 5명을 깎아서 45명이면 어찌 하려는 가라고 하나님께 협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의인 40명이면 어찌하겠는가 라고 재조정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도 허락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30에서, 20, 그리고 20에서 10명으로 내려갔습니다. 만약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다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의인 10명도 없었습니다. 아니 10명은 고사하고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즉 롬3:10이하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의인이 있다면 우리의 구속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 우리의 중 보자 입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악하고 나는 의롭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도 죄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는 만백성을 구원하러오신 구세주요, 그 이름을 믿어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의인으로 인정해주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믿을 수 있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 뜻대로 생활하면 주님께서 택한 자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내 방법대로 살던 삶을 이제는 주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모든 문제가 주안에서 해결함 받고 승리하는 복된 삶이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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