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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敎訓), (창11:1-9절)
대산지기
2008. 2. 28. 15:19
바벨탑 사건이 주는 교훈(敎訓)
창11:1-9절, 234.235.241장, *
오늘 읽은 본문은 이른바 바벨탑 사건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물을 만드시고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으로 살려고 했으며 타락한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만 갔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홍수 심판을 통해서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나머지는 모두 멸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식구들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를 구상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영광받기를 기대했으나 처음부터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후손들은 무수히 번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류들이 온 세상에 편만해서 땅을 정복하고 문화를 일구며 그들 나름대로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과 간계는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앞세워서 인간의 단결과 단합을 통해서 서로가 흩어짐을 막고 자신들의 엄청난 힘을 내외에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바벨탑을 쌓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진리를 발견(發見)합니다.
이 바벨탑 사건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엄청난 상상의 힘도 있고 엄청난 노동의 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 없이 시작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나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홍수심판에 대해서 직접 간접으로 체험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검은 구름을 봐도 가슴이 덜컥 했겠고, 바람이 세게 불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조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꽉 찼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들의 힘은 상호화합과 교제에 있고 흩어지는 것은 곧 멸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부르짖으면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벨탑은 나름대로 웅장한 문화사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깊이 따져보면 처음부터 바벨탑은 단순한 탑이 아니라 거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종교적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인류의 단합이나 평화의 복지니 하는 것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배신한 종교운동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으로서,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인본주의 종교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야망도 대단했습니다. 벽돌을 구어 탑을 쌓아서 하늘 꼭대기까지 이르겠다는 야망이었습니다.
그들의 야망은 탑을 하늘 꼭대기까지 쌓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교만도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인위적으로 단결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영광과 찬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실상 오늘의 현대 인간들의 삶의 모습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무신운동이요 배교의 운동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언어를 혼잡케 함으로서 그들의 꿈을 깨었습니다. 언어가 서로 달라진 것은 오늘날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1200개가 넘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와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분열의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바벨탑으로 말미암아 분열되고 혼잡된 언어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연합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몇가지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벨탑운동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번 바벨탑은 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저들의 오만방자함을 무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중심적,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은 줄기차게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반역운동은 생래적이었습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광분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이 세워진 곳이 바벨론 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바벨론은 언제나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대표적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바벨탑운동과 바벨론 운동은 한때 성공하는 듯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멸망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은 필요없다고 하는 자들도 과학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이성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도 교만의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계몽주의 합리주의란 이름으로 자행된 무신론운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직 게르만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인류의 살길이고 여기에 방해되는 것은 모두 처치해도 좋다는 히틀러는 현대의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입니다. 레닌, 스탈린 등이 벌인 공산주의 운동도 오늘의 바벨탑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바벨탑 운동을 묵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 운동은 일시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4절에 보면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ꡓ라고 했습니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단체이건 간에 하나님없이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낮추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꾼을 세우려고 합니다. 일꾼은 절대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주의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십자가 뒤에 감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대신에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것은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바벨탑 운동입니다. 교회에서는 잘 숨을 줄 아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일을 잘하고 난 다음에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 그것은 실패작이 됩니다. 주의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 아직도 자존심 대결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집사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주의 영이 가사로 내려가는 곳까지 가라고 했을 때 갔고, 주의 영이 빌립을 데려갔을 때 아무소리 없이 순종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원리와 세상에서의 일하는 원리는 서로 다릅니다.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은 되도록 P․R을 잘해야 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자기 이름을 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이 선거에 승리하는 첫번 비결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명함, 현수막, 포스터를 통해서 널리 널리 알리고 자기 업적을 드러내고 자기를 나타내어야 됩니다.
그러나 주의 교회의 일은 일할 때도 자기를 숨기고 일하고 난 다음에도 내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주앞에 모든 영광 존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고, 은혜를 유지하고 축복받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는 높이시고 교만한 사람은 낮추어 버립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며 교만하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서 내가 했고 우리가 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진정한 인간의 화합과 단결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화합과 단결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자기들의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어두워졌기에 그런 인간적인 겸손이 도리어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멀어졌기 때문에 인간관계로 깨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회복도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지만 인간과 인간과의 회복도,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벨탑 건축자들의 언어를 혼잡케 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장벽이 무너졌던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와 우리 사이에 막혔던 장벽은 성령의 권능으로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그리고 부모자녀간에 그리고 부부간에 막혔던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허물어집니다. 현대인의 고통은 서로 막혀있는 것입니다.
막히는 것이 뚫어지는 것은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것도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롬11:36절에 말씀처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 창조될 때부터 우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꽂으라고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여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기시옴을 받으시옵소서ꡓ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아니고 그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의 바벨탑 운동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죄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흩어진 언어의 장벽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성경안에서 회복되고 치료되어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11:1-9절, 234.235.241장, *
오늘 읽은 본문은 이른바 바벨탑 사건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물을 만드시고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것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으로 살려고 했으며 타락한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만 갔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홍수 심판을 통해서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나머지는 모두 멸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식구들을 통해서 새로운 인류를 구상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영광받기를 기대했으나 처음부터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후손들은 무수히 번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류들이 온 세상에 편만해서 땅을 정복하고 문화를 일구며 그들 나름대로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과 간계는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앞세워서 인간의 단결과 단합을 통해서 서로가 흩어짐을 막고 자신들의 엄청난 힘을 내외에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벨탑을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바벨탑을 쌓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진리를 발견(發見)합니다.
이 바벨탑 사건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엄청난 상상의 힘도 있고 엄청난 노동의 힘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 없이 시작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나버린다는 사실입니다.
홍수심판에 대해서 직접 간접으로 체험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검은 구름을 봐도 가슴이 덜컥 했겠고, 바람이 세게 불어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조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꽉 찼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들의 힘은 상호화합과 교제에 있고 흩어지는 것은 곧 멸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대동단결을 부르짖으면서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 바벨탑은 나름대로 웅장한 문화사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깊이 따져보면 처음부터 바벨탑은 단순한 탑이 아니라 거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종교적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인류의 단합이나 평화의 복지니 하는 것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배신한 종교운동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으로서,
인간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며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인본주의 종교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야망도 대단했습니다. 벽돌을 구어 탑을 쌓아서 하늘 꼭대기까지 이르겠다는 야망이었습니다.
그들의 야망은 탑을 하늘 꼭대기까지 쌓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교만도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인위적으로 단결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영광과 찬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실상 오늘의 현대 인간들의 삶의 모습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무신운동이요 배교의 운동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언어를 혼잡케 함으로서 그들의 꿈을 깨었습니다. 언어가 서로 달라진 것은 오늘날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1200개가 넘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와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분열의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바벨탑으로 말미암아 분열되고 혼잡된 언어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제거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정한 연합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몇가지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벨탑운동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첫번 바벨탑은 언어를 혼잡하게 함으로 저들의 오만방자함을 무력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중심적,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은 줄기차게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반역운동은 생래적이었습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았지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광분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이 세워진 곳이 바벨론 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핵심은 바벨론은 언제나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대표적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바벨탑운동과 바벨론 운동은 한때 성공하는 듯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멸망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므로 하나님은 필요없다고 하는 자들도 과학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이성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도 교만의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계몽주의 합리주의란 이름으로 자행된 무신론운동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직 게르만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인류의 살길이고 여기에 방해되는 것은 모두 처치해도 좋다는 히틀러는 현대의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입니다. 레닌, 스탈린 등이 벌인 공산주의 운동도 오늘의 바벨탑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바벨탑 운동을 묵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바벨탑 운동은 일시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4절에 보면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ꡓ라고 했습니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단체이건 간에 하나님없이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낮추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일꾼을 세우려고 합니다. 일꾼은 절대로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주의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십자가 뒤에 감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대신에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것은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바벨탑 운동입니다. 교회에서는 잘 숨을 줄 아는 사람이 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일을 잘하고 난 다음에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 그것은 실패작이 됩니다. 주의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 아직도 자존심 대결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집사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주의 영이 가사로 내려가는 곳까지 가라고 했을 때 갔고, 주의 영이 빌립을 데려갔을 때 아무소리 없이 순종했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원리와 세상에서의 일하는 원리는 서로 다릅니다.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은 되도록 P․R을 잘해야 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자기 이름을 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이 선거에 승리하는 첫번 비결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명함, 현수막, 포스터를 통해서 널리 널리 알리고 자기 업적을 드러내고 자기를 나타내어야 됩니다.
그러나 주의 교회의 일은 일할 때도 자기를 숨기고 일하고 난 다음에도 내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주앞에 모든 영광 존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고, 은혜를 유지하고 축복받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는 높이시고 교만한 사람은 낮추어 버립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며 교만하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 이름을 드러내면서 내가 했고 우리가 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진정한 인간의 화합과 단결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화합과 단결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자기들의 업적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어두워졌기에 그런 인간적인 겸손이 도리어 분열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 멀어졌기 때문에 인간관계로 깨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회복도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지만 인간과 인간과의 회복도,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바벨탑 건축자들의 언어를 혼잡케 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언어의 장벽이 무너졌던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와 우리 사이에 막혔던 장벽은 성령의 권능으로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그리고 부모자녀간에 그리고 부부간에 막혔던 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허물어집니다. 현대인의 고통은 서로 막혀있는 것입니다.
막히는 것이 뚫어지는 것은 인위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이름을 이 세상에 나타내는 것을 목표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것도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롬11:36절에 말씀처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 창조될 때부터 우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꽂으라고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여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기시옴을 받으시옵소서ꡓ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아니고 그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오늘의 바벨탑 운동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죄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흩어진 언어의 장벽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성경안에서 회복되고 치료되어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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