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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 (창22:7-14절),

대산지기 2008. 2. 28. 15:14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
창22:7-14절, 162.167.478장&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부르셨고(창12:1절),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 가나안으로 옮겼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로, 사래를 사라(열국의 어미)로 끌어 올렸습니다.(창17:5절).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신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는 아브라함 가정의 웃음이 있었고 세계의 기쁨이 되었습니다.(창22:1-9절).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언약의 아버지, 믿음의 조상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 아니 겟세마네 갈보리까지 높이 쳐들어 올리시기로 하였습니다. 끌어올리는 방법은 예배였습니다.

1.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는 부름입니다. 1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그에게 축복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귀는 인간을 타락케 하고 파멸케 하려고 시험하나 하나님은 축복하시기 위하여 시험하십니다.(약1:12-13; 신8:16절). 그리고 우리 믿음이 성장할수록 시험도 큰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이 클 때에는 그 시험을 이긴 후 축복도 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귀중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연단 시키시고 좀더 견고히 세우시기 위하여 그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아브라함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실질적으로 축복하시기 위하여 그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 시험은 백세에 얻은 그의 소중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죄 중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은총에 감사하는 생활을 가득 차 있는가를 확인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한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욥"도 이처럼 극심한 시험 가운데서 단련 받았습니다. 욥은 그 시험을 통하여 선한 사람일뿐만 아니라 위대한 신앙 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신앙 인들에게 주시는 시험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영광 받으시고,

더욱 강건한 신앙 인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시려고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떨어진 시험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네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라"는 내용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심정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그 음성은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스러움이었습니다. 견딜 수 없이 괴로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시험은 가장 가까운 데서 그리고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다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게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번제를 드리라고 부르시었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 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번제는 대개 짐승을 잡아 죽여서 각을 뜨고 피를 뿌리고 제물 전부를 제단 위에,

불살라 드리는 가장 기본적 제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상적 관계를 나타내는 제사였습니다. 이 번제 행위를 아브라함은 경배(창22:5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번제는 곧 예배를 의미합니다. 이 번제 행위는 하나님 자신께로부터 나타낸 객관적 계시 행위입니다.

결코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단적 유혹의 관계도 아닙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인격적 하나님 자신께로 나왔습니다.(창22:1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번제드리라는 내용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백세에 난 아들 이삭이었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우양이나 그의 종이 아니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물을 번제로 드릴 때는 그 제물을 칼로 조각을 내어 불타는 나무 위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100세에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했던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꿈과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들을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상의 것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비단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마22:33-38절).

그분은 최상의 선물을 원하십니다.(마6:20절). 또한 최상의 봉사와(마10:40-42절). 최상의 충성을(눅9:23-24절)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최상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최상의 것을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2)번제의 장소는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브엘세바"가 아닌 "모리아" 땅이었습니다. 이 모리아 땅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악 지대였습니다. 바로 이 곳은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장소요 그곳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곳입니다.(삼하24:16-17절). 바로 그곳이 주님께서 기도하신 지역이요 피 흘려 운명하신 곳입니다.

바로 예배는 재물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성별의 장소까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3)예배의 방법은 번제 였습니다. 제물인 이삭을 죽여서 피와 함께 그 몸을 불태워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에 의해 제단을 마련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더니 손을 꼭꼭 묶었습니다.

또 온 몸을 결박하였습니다. 이삭은 나무단 위에 올려졌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3.순종심을 보시려고 부르십니다. 엇갈리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그는 결단하였습니 다. 일찍이 일어나(3절) 나귀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떠났습니다. 죽고 싶은 정도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는 아브라함! 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거역하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순종한 것입니다. 과거 그가 본토를 떠난 때처럼, 할례를 행할 때처럼 지체하지 않고 행동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 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믿음으로 바로 그를 향한 경외와 그의 뜻에 따르는,

순종으로 우리 생활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불순한 사울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것은 종교적인 형식이나 제도가 아니라

그 속을 충실히 채워 주는 실제적인 내용, 즉 구체적인 생활의 현장에서 직면하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순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지체함이나 망설임이나 뒤돌아봄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롯"의 처를 보십시오! 죄악에 대한 멸망이 예고되었는데도,

잃게 될 재산을 생각하고 뒤돌아 본 롯의 아내(창19:26절), 그녀의 종국이 어떠하였습니까? 우리가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전진할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푸른 초장 위로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시23:1-2절).

4.믿음을 보시기 위해 부르시었습니다. 히11:19절에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 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즉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거역할 수 없다는 피동적인 복종이 아니라 죽어도 새로 지음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앙이 희생의 재물을 가능케 했습니다. "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있을 수 없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토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인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인 결단은 혈연보다 앞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항변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과 의논하는 저주도 없었습니다. 이삭을 바치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신앙은 침묵의 신앙이었습니다. "희생의 제물에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부딪치는 행동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 신앙은 100세에 얻을 수 없는 이삭을 얻었기에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더 큰 섭리가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삭까지도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호와 이레를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헌신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침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요,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순간이라도 끝까지 헌신할 때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을 보려면 자신의 끝에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전에, 큰그릇으로 쓰시기 전에 위대한 헌신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인간은 불가능하여도 하나님은 가능하다고 절대 믿는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5.여호와 이레의 계시의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의 두 손에 잡혀 하늘로 올려진 시퍼런 칼날이 막 이삭 앞으로 떨어지려는 그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연속해서 자기 이름을 불러오는 뜻밖의 영음 앞에 아브라함은 압도되었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이 나오게 되었습니다.(창22:11절).

그를 불러 준 영음의 정체는 바로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1)네 아들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2)너의 신앙은 참되도다. (3)하나는 음성이 아니고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소리 없이 수풀에 걸려 있는 한 마리 수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때야 수풀(가시넝쿨)에 그 뿔이 걸려 있는 수양을 이삭대신 하나님의 번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사자의 소리 없는 계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이 수양이 여호와의 산(갈보리-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여 세상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예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자는 자기 제자의 예표를 아브라함에게 한 마리 수양으로 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 곧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성령의 지시에 의한 위대한 갈보리 예언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또한 우리 예배의 절정이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의 절정은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에 있습니다.(요1:29절).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산인 오늘의 교회는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번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교회 예배는 진실로 기독교 예배일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도 있었습니다.

6.인정하신다는 부르심입니다. 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네 신앙과 충성을 내가 알았노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나는 너에게서 도무지 신앙을 찾지 못하겠노라"고 하신다면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마7:22-23절). 성경에 보면 인정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는데,

마8:10절에는 백부장을 가리키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마15:28절에는 딸이 흉악히 귀신들려서 주님께 고쳐달라고 구하던 여인을 위하여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므로

그 여인이 큰 믿음이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마19:16-20절에는 한 부자 청년의 계명을 잘 지킨 것도 인정하시었고, 요1:47절에는 나다나엘이 간사함이 없는 것을 인정하시었고, 행8:36절에는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가 세례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을 인정하여 세례를 베풀었고,

딤후1:5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가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로 효자이고 근신한 것을 인정하여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음 같이 우리는 먼저 주님께로부터 또는 주의 종과 이웃들로 인정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7.축복의 계시의 부름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된 축복을 재확인시켜 줍니다. 1)큰복을 준다고 하시었습니다. 17절에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이 큰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믿음의 복입니다.

그 믿음의 복은 전 세계적으로 미치는 우주적 축복인데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간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갈3:14절). 믿음은 복의 으뜸(큰 복)입니다. 이유는 믿음만이 구원의 빙거이기 때문입니다. 2)영적 후손의 축복입니다.

17절에 "네 씨로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하였습니다. 이는 신앙의 후손이 많아질 것에 관한 축복입니다. 교회의 축복입니다. 별과 같이 빛나고 반짝이는 자손,

모래알 같이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축복을 뜻합니다. 3)승리의 축복입니다. 17절에 "네 씨가 그 대적이 문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들의 모든 면에서의 승리를 뜻합니다. 건강, 지혜, 물질, 명예, 권세 등에서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4)메시아의 축복입니다. 18절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국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가정에서 인류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화육(化育) 강세(降世)하여 만민의 구주가 될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직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화육 강세하심은 크나 큰 축복입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삼일 동안 행진을 계속하는 아브라함의 모습 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순진하게 잠든 이삭을 보면서, "번제(燔祭)할 어린 양이 어디 있느냐"는 아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아비된 아브라함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 아들을 향하여 높이 칼을 들었을 때 바로 이때 오히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는 다급한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이레의 사랑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창22:7절에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8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라고 했습니다. 아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당황하지 않고 믿음으로 답변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준비하셔놓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하시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이성의 이치에 맞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믿음으로 실천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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