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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께 인정받은 노아가 실수를.(창9:20-29절),

대산지기 2008. 2. 28. 15:09
하나님께 인정받은 노아가 실수를.
창9:20-29, 10:32절, 265.246.457장.&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사람은 별수 없구나 하는 실망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120년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전도하던 당대의 의인 노아도 저토록 수치스런 몰골로 역사에 비추어지다니 저으기 낙심이 됩니다. 또 그뿐 아니라 성경은 어쩌자고,

한 위대한 영웅적 인물을 아무 거리낌없이 낯뜨거운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 역사(役事)의 기록(記錄)에 남겼을까하는 점도 있습니다. 또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아버지의 뒤치닥거리의 방법에 따라서 축복과 저주의 명암이 갈리는 것도 너무 심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그러면서도 이 본문의 유일한 배경으로 깔린 밑그림은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와 민족과 종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복잡해도 하나님께서는 셈족 곧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붙들어주셔서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도모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할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우선 히브리서 11:7절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하였습니다. 노아의 승리적 삶을 기록했습니다. 한편 로마서 3: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마치 위의 성경구절들을 증명이나 하듯이 노아는 120년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그토록 그 시대의 문제와 죄를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대홍수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그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누추한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강적들과 싸워서 승리한 불사조 같은 사람이라도 자기 집에 몰래 침입한 자객에 의해서 암살 당하는 것처럼 외부에서 오는 공격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산중의 적은 잡을 수 있는데 마음속에 있는 적은 못 잡은 셈이라고 할까요?

노아는 많은 무리 중에서는 반석처럼 믿음으로 굳게 섰지만, 이제 자기자신의 장막 속에서는 타락했습니다. 노아는 늘 외부의 유혹과 공격에는 대처했지만 자신과의 싸움에는 별로 투쟁을 못했습니다. 노아는 사생활에서 방만하게 자기 자신을 내던져 버렸습니다.

긴장을 늦추고 절제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토록 부끄러운 수치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공개된 장소와 상황에서는 비교적 예절바르고 꼿꼿하게 진리편에 섰다가도 자기 혼자 있을 때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운 사생활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의 가정생활에서 우리의 언행 심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많습니까? 생각하면 부끄러운 것이 한 두 가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지 은밀한 것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공적인 생활이나 사생활이나 할 것 없이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섰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깨끗하게 보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쁜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집안에서의 삶 속에서, 자기를 순결하게 지켜나가야 합니다. 노아는 농사하는 일로 정착되었고 첫 농사로 포도를 수확했습니다. 노아는 여기까지는 의로웠습니다. 노아가 자기가 경작한 열매를 먹는 것도 문제될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제하지 못해서 지나치게 포도주를 마심으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어찌 보면 나이 많은 노인네가 어쩌다가 맛있는 포도주를 계속 마시다가 의식을 잃고 입에 담기가 민망한 수치를 당했습니다. 노아의 일반적인 성품으로 보면 실수는 부주의요 방심정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나이나 성품도 시험의 때에 자신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의 500년동안 깨끗하고 순결하고 의롭게 산 노아가 그토록 수치를 당할지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술 취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술이 죄라든지 술이 악이라든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술은 자기 통제능력을 잃어버리고 죄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며 무엇 때문에 경건한 삶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까?

그것은 모든 악에서 우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민족은 망하지 않습니다. 파숫군이 깨어 있는 군대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만이 자신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 성경은 어느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어 예찬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세상의 영웅전기라면 그의 공적생애뿐 아니라 그의 사생활까지 미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철저하게 인간의 내면의 죄와 실수까지 기록해서 하나님만이 참되시며 인간은 모두가 허물과 죄로 별수없이 죽었고, 하나님만이 구원자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진리이며 성경계시만이 하나님은 누구시며 인간은 누구며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계시하고 있습니다.둘째로 이 본문의 메시지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은 축복을 받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어 내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실수와 범죄는 노아가 했는데 느닷없이 불똥은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떨어진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자기 집에서 입든지 벗든지 자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본문의 내용은, 술을 과음해서 옷을 다 벗고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민망한 장면을 보였습니다.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시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일단 술에 취하면 윤리니 도덕이니 경건이니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사실 노아에게는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온 신앙의 여정으로 보나 경건한 신앙 생활로 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방주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인간의 본성의 밑바닥을 그대로 보인 것이 되었습니다. 노아는 그의 신체의 수치스런 부분만 드러낸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마음속에 있는 수치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목격한 함은 재미있다는 듯이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지 않고 두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 셈과 야벳은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질해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다고 했습니다.

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안 노아는 가나안에게는 저주를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주었습니다. 효성스런 자녀는 아비가 비록 부족해도, 비록 실수를 해도 아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수치를 가리워주려는 두 아들은 효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함은 미쳐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공개적으로 약점과 죄를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몰락과 추락을 즐기는 못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의 정서는 남이 잘되고 성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 못 봐주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동업자가 동업자(同業者)를 헐뜯게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남의 수고와 공로는 평가 절하해서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니라고 선전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과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사랑하고 용서합시다. 못볼 것을 보고 못들을 말을 들었다고 동네방네로 돌아다니면서 말을 일으키고 그것을 확대 해석해서 부풀려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셈과 야벳의 태도에서 보듯이 아비의 실수와 부끄럼을 조용히 덮어주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간에, 동료끼리, 성도끼리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주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심판하시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만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남의 허물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서 자자손손 불행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의 허물을 덮어준 셈은 종교적인 민족, 하나님의 계시의 수호자로 축복을 받았고, 야벳은 땅 위에서 물질의 축복을 한없이 받았습니다.

노아의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그 자손들을 통해서 여전히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남의 허물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리워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항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인격을 존중해야합니다.

평가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옆 사람과 협력해서 같이하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셈과 야벳 형제는 뒷걸음질로하여 아버지의 옷으로 허물을 기리워 주었습니다.

아주 작은 일인데도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작은 일에 충성하여 천국 잔치에 참예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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