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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5:21-32절),
대산지기
2008. 2. 28. 15:08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 5:21-32절, 455.490.500장.&
창세기 5장에는 첫 사람 아담이후의 계보가 나옵니다. 이 계보는 창4:25∼26절의 계보와는 서로 다릅니다. 범죄자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계보를 이은 셋의 후손으로 크게 대별되고 있습니다. 물론 가인의 후손들은 오염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은 중혼(19절), 무기제작(22절), 증오와 복수의 노래(23∼24)등으로 이들이 일구어낸 문화는 철저히 향락추구의 퇴폐문화였고, 정복과 압제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져버린 인생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셋을 계보로한 경건한 자손들의 족보입니다. 성경이 경건한 계보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하나님 자신이, 친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셋의 계보를 통해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이 본문은 단순히 연대기적 기록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구속의 구체적 손길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역사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속의 목표를 향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성경기록의 목적입니다. 특히 성경을 보면 그 계보중에는 비교적 중요한 인물들만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누락했습니다. 이것도 이 성경기록이 단순히 연대기적 나열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만을 취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읽으면서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은 지금에 비하면 장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아담은 930세를 살았고 셋은 912세를 살았으며,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969세로 최장수자였습니다. 홍수 이전에 이렇게 장수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밝힌 내용을 이상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뿐입니다. 또 당시에는 지금처럼 환경공해나 인스턴트 식품도 없고 순수하게 자연식을 했기 때문에 노쇠를 막아주었다는 것을 영양학자들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읽은 메시지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에녹의 삶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칠대손으로서 장수자였던 야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에녹은 "신임자" 또는 "가르친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와 에녹이었습니다. 또 육신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도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엘리아이고 또 한 사람은 에녹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증거를 동시에 얻은 자는 에녹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귀한 삶을 살았던 에녹에 대한 기록은 불과 넉 줄밖에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에녹의 삶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녹의 기사를 너무나도 간결하게 취급합니다. 이 성경의 기록자인 모세는 어찌하여 그토록 하나님앞에 깨끗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한 에녹은 단 넉 줄로 기록하고,
하나님과 부모와 형을 속인 야곱에 대한 기사는 창세기의 절반을 차지하도록 기록했는가 함입니다. 그것은 이 성경의 기록은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운동의 성격과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나타내고자 함이지 결코 사람의 행적을 드러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는 에녹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히11:5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곧 신앙이란 말입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구체적인 걸음입니다. 신앙은 명사(名詞)가 아니라 동명사(動名詞)입니다. 사실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그 한 마디로 족합니다. 말하자면 365년을 사는동안,한결같이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도 예수도 성경도 없이 다만 자기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중심이며 무엇이든지, 내가 해야지 다른 사람이 하면 다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는 철저한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가 버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끼리도 같이 길을 가려면 자기 고집만을 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좀더 구체적인 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커라는 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동행하는 방법으로 8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말씀연구, 계속적이며 진지한 기도, 외부로 나타내 보이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한 예의주시,
내적인 하나님의 역사, 순종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 성도들간의 사귐, 묵상의 생활 등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을 단순히 관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위에서 말한 여덟가지의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걸음이 있어야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것이 바로 성도의 기본적인 훈련지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과 동행하면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빠졌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잠3: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또 시편 32:8절에 "내가 너의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경기 불황으로 불안하고 초조하고 위축된 때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갖게 되면 언제라도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지도를 받게될 줄 믿습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면 타락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시편 16:8절에 있는 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공격은 그칠 줄 모르고 유혹의 손길은 언제나 성도들을 파멸로 몰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요동치 않고 죄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가 연약하고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사야 41:10절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이보다 더 큰 보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로 생각해 볼 것은 에녹은 너무도 평범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우리 본문 창 5:22절에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경건한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의 생활과는 담을 쌓고 별스런 세계에 사는 듯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별스런 신앙생활 자체를 경건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 자녀를 기르며 교육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희한하고 별스런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결혼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속에서 고통과 아픔, 수고와 흐르는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삶입니다.
카톨릭의 신부나 불교의 승려는 독신을 지키며, 그들 종교의 계율을 지키려고 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참으로 신선하고 신비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목회자는 에녹처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슬픔도 괴로움도 고난도 함께 하면서 신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바울의 깊은 뜻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에녹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로 이런 에녹의 신앙패턴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줄 믿습니다. 끝으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가장 어려운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에녹에 관한 기사는 유다서 1:14∼15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에녹이 삼백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그 시대가 태평성대 하거나 신앙생활하기가 좋았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던 주변환경은 경건한 자가 발붙일 수 없을 만큼 사특하고 악한 시대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오늘의 세상을 탓하고 오늘의 환경을 탓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한파로 말미암아 경제는 곤두박질 치고 언제 직장을 잃게 될는지 불안 초조가, 계속되고 물가는 계속 뛰고, 사업은 하나도 제대로 돌지 않고 계속되는 불경기로 자포자기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를 속상하게 하는 것은 이런 때에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더욱 뚜렷해져서 돈많은 부자는 가만히 앉아서 불로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당시의 어려움과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절)고 말씀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환난때 빛이 납니다.
참된 신앙은 어려운때 일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능력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안전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새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창 5:21-32절, 455.490.500장.&
창세기 5장에는 첫 사람 아담이후의 계보가 나옵니다. 이 계보는 창4:25∼26절의 계보와는 서로 다릅니다. 범죄자 가인의 후손과 아벨의 계보를 이은 셋의 후손으로 크게 대별되고 있습니다. 물론 가인의 후손들은 오염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은 중혼(19절), 무기제작(22절), 증오와 복수의 노래(23∼24)등으로 이들이 일구어낸 문화는 철저히 향락추구의 퇴폐문화였고, 정복과 압제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져버린 인생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셋을 계보로한 경건한 자손들의 족보입니다. 성경이 경건한 계보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이유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하나님 자신이, 친히 간섭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셋의 계보를 통해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이 본문은 단순히 연대기적 기록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구속의 구체적 손길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역사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속의 목표를 향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성경기록의 목적입니다. 특히 성경을 보면 그 계보중에는 비교적 중요한 인물들만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누락했습니다. 이것도 이 성경기록이 단순히 연대기적 나열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속사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만을 취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을 읽으면서 또 하나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은 지금에 비하면 장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아담은 930세를 살았고 셋은 912세를 살았으며,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969세로 최장수자였습니다. 홍수 이전에 이렇게 장수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밝힌 내용을 이상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 것뿐입니다. 또 당시에는 지금처럼 환경공해나 인스턴트 식품도 없고 순수하게 자연식을 했기 때문에 노쇠를 막아주었다는 것을 영양학자들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읽은 메시지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에녹의 삶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칠대손으로서 장수자였던 야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에녹은 "신임자" 또는 "가르친다"는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은 두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와 에녹이었습니다. 또 육신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도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엘리아이고 또 한 사람은 에녹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 증거를 동시에 얻은 자는 에녹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귀한 삶을 살았던 에녹에 대한 기록은 불과 넉 줄밖에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에녹의 삶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에녹의 기사를 너무나도 간결하게 취급합니다. 이 성경의 기록자인 모세는 어찌하여 그토록 하나님앞에 깨끗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한 에녹은 단 넉 줄로 기록하고,
하나님과 부모와 형을 속인 야곱에 대한 기사는 창세기의 절반을 차지하도록 기록했는가 함입니다. 그것은 이 성경의 기록은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운동의 성격과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나타내고자 함이지 결코 사람의 행적을 드러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우리는 에녹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신앙생활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히11:5절에 있는 대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곧 신앙이란 말입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구체적인 걸음입니다. 신앙은 명사(名詞)가 아니라 동명사(動名詞)입니다. 사실 에녹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그 한 마디로 족합니다. 말하자면 365년을 사는동안,한결같이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도 예수도 성경도 없이 다만 자기자신의 욕구충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중심이며 무엇이든지, 내가 해야지 다른 사람이 하면 다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는 철저한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가 버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끼리도 같이 길을 가려면 자기 고집만을 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좀더 구체적인 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커라는 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동행하는 방법으로 8가지를 제시했습니다. 말씀연구, 계속적이며 진지한 기도, 외부로 나타내 보이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한 예의주시,
내적인 하나님의 역사, 순종하는 생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 성도들간의 사귐, 묵상의 생활 등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을 단순히 관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위에서 말한 여덟가지의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걸음이 있어야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것이 바로 성도의 기본적인 훈련지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님과 동행하면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빠졌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잠3:6절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또 시편 32:8절에 "내가 너의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처럼 경기 불황으로 불안하고 초조하고 위축된 때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갖게 되면 언제라도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지도를 받게될 줄 믿습니다. 또 하나님과 동행하면 타락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시편 16:8절에 있는 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공격은 그칠 줄 모르고 유혹의 손길은 언제나 성도들을 파멸로 몰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요동치 않고 죄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우리가 연약하고 상처를 입었을 때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사야 41:10절에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이보다 더 큰 보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로 생각해 볼 것은 에녹은 너무도 평범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우리 본문 창 5:22절에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경건한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의 생활과는 담을 쌓고 별스런 세계에 사는 듯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별스런 신앙생활 자체를 경건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면서 자녀를 기르며 교육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신앙은 희한하고 별스런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결혼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속에서 고통과 아픔, 수고와 흐르는 눈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삶입니다.
카톨릭의 신부나 불교의 승려는 독신을 지키며, 그들 종교의 계율을 지키려고 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참으로 신선하고 신비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목회자는 에녹처럼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슬픔도 괴로움도 고난도 함께 하면서 신앙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바울의 깊은 뜻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에녹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고 가장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로 이런 에녹의 신앙패턴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줄 믿습니다. 끝으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가장 어려운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에녹에 관한 기사는 유다서 1:14∼15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에녹이 삼백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그 시대가 태평성대 하거나 신앙생활하기가 좋았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던 주변환경은 경건한 자가 발붙일 수 없을 만큼 사특하고 악한 시대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오늘의 세상을 탓하고 오늘의 환경을 탓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한파로 말미암아 경제는 곤두박질 치고 언제 직장을 잃게 될는지 불안 초조가, 계속되고 물가는 계속 뛰고, 사업은 하나도 제대로 돌지 않고 계속되는 불경기로 자포자기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를 속상하게 하는 것은 이런 때에 부익부 빈익빈,현상이 더욱 뚜렷해져서 돈많은 부자는 가만히 앉아서 불로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일수록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당시의 어려움과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절)고 말씀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환난때 빛이 납니다.
참된 신앙은 어려운때 일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능력을 얻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안전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새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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