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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4:1-15절)

대산지기 2008. 2. 28. 15:06
가인과 아벨의 제사
창 4:1-15절, 185.412.487장.&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인류의 최초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은 제사문제로 말미암아 결국 살인극이 벌어졌습니다. 형 가인은 살인자가 되고 동생 아벨은 첫 번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 본문의 사건은 종교문제 곧 예배의 방법문제였습니다.

제사의 방법이 문제였는데 그 제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열납했으나 가인의 제사는 거부했다는데 오늘 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좀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최초의 가정인 아담과 하와는 실패했습니다.

그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뿐아니라 장차 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직접 구원의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이며 그것이 바로 복음(福音)이었습니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다른 생명이 대신 희생을 지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부끄럼을 가리던 무화과나무 잎사귀 대신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가죽옷은 양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하나의,상징성을 갖고 있는데 장차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의 희생이 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계시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 스스로 구원의 방법을 찾아보고 연구하는 것이지만 계시종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한 대로의 방법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들들을 낳았는데 형의 이름은 가인이요, 둘째의 이름은 아벨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난후에 두 아들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은 제사의 방법이 달랐고 그 제물이 서로 달랐습니다.

우선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에 자기가 수확한 모든 농산물을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오곡백과를 가지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결국 오늘 한국사람들이 조상에게 제사하는 방식도 따지고 보면 바로 가인의 제사 방식을 그대로 본 뜬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이 비도덕적이고 비종교적이라고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는 맏아들을 더 사랑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이란 말의 뜻은 소유란 뜻이고 아벨은 허무란 뜻입니다. 이름에는 부모의 뜻과 소원을 담기 마련인데 맏아들에 대한 기대와 사랑이 둘째 아들보다 훨씬 더 깊었던 것 같습니다.

가인도 나름대로 집안의 장손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예배의 대상이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이었으나 제물로서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거부당한 것입니다.

사실 가인은 종교적인데다 자기 직업에서 얻은 풍성한 농산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그 자체가 우리에게 강력(强力)한 메시지를 전달(傳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인간(人間)의 방법(方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은 형 가인에 비해서 부모에게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그가 제사 지낼 때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계시이며 웅장한 메시지입니다. 사실 어찌보면 아벨은 직업상 양을 치는 목동이었기에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예배했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대속의 죽음 곧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깨닫고 자기의 연약함과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결국 아벨이 하나님께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게된 것은, 이미 그의 부모들에게 계시해준 대로의 방법을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히11:4절) 여기서 믿음이란 일반적 의미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예배의 방법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를 받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이 바로 위대한 계시입니다. 가인도 좋은 종교인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은 자기 중심적(中心的)인 종교인이었습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 그 방법이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말하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외의 방법으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인간의 경험과 역사에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믿든지 하나님만 섬기면 된다고 말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종교는 약간의 방법이 다를 뿐이지 다 꼭 같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말하자면 인본주의적인 방법을 예찬하는 종교인이 가인에게 속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 계시를 따르는, 복음적 기독교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왜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종교인가라고 항거합니다. 무슨 종교든 다 좋은 것이고 무슨 종교든 다 인간을 유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다 나름대로 진리(眞理)도 있고 유익을 위해 있는 것이 사실(事實)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종교가 아니라 바로 생명운동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려는 것이나 여호와의 참 종교 기독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들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인이 변해서 의인이 되고 죽었던 심령이 새롭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종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는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적어도 외면적(外面的)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방식대로 자기 좋아하는 대로의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께서 계시한 대로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교인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주일날만 교인이 되지 말고 우리의 삶의 전부를 주님께 드립시다. 우리 교회에 등록교인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등록교인으로서 예수의 십자가(十字架)의 사랑에 감격(感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도 종교인은 많은데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없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눈물과 땀을 바쳐 희생하며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예배의 방법은 가인과 아벨을 완전히 갈라놓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자기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는데 대해서 심한 불쾌감과 모멸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문제를 동생에게 돌렸습니다. 동생의 제사는 하나님께 상달됐기 때문에 그때부터 동생을 미워하고 증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인은 역시 아담의 아들이었기에 그 마음속에 본질적으로 죄악의 요소가 이글거렸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종교적인 문제요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의 신앙문제를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함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의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미움과 증오는 얼마나 무섭습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곧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남편을 토막내 죽이고 아내를 토막내 죽이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결국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 잔인성과 증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인간인지라 교회를 섬기는데 있어서 의견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입장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미운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성은 말씀과 성령으로 통제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지라도 자기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바라볼 때는 그 마음이 없어집니다. 더구나 우리를 용서하기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일곱 번까지는 용서할까요 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최대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 씩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용서가 없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기독교(基督敎)가 아닙니다.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고 하나님이 그를 심문하고자 불렀을 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뻔뻔스럽게 항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실 인간은 자기의 형제와 이웃을 지켜주는 자여야 합니다. 이웃에 대해 자기 책임을 다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방법대로 믿는 자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게 영광을 돌려야합니다.

고전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부부생활도 가정생활도 직장생활도 장사하는 것도 자녀교육을 시키는 것도 재산을 증식시키는 것도 빨래하고 밥을 짓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모든 일에 성실 근면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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