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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지으신 가죽옷(창3:15-24)

대산지기 2008. 2. 28. 15:01
인간의 죄와 하나님이 지으신 가죽옷
창3:15-24절, 278.305.360장.*

옷이 날개란 말이 있습니다. 또 의식주는 우리의 생활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 중에서도 옷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옷을 입는 패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뿐 아니라,

그 패션이 산업이 되고 예술로 승화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패션모델은 엄청난 인기직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듯 옷은 인간의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입었으나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이 그 시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힌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전체의 흐름과 뜻을 살피면서 이 성경이 가르친 오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창세기 3장에는 두 가지의 큰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실낙원이고 둘째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창세기 3장은 인간의 죄의 기원을 밝혀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운동의 기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원은 역사적 사건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할 뿐 아니라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과 방법도 아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까지 창조, 타락, 구속의 세 가지 내용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우리에게 명백한 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성경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는 인생과 우주와 세계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한결같이 인간과 우주와 세계와 영원한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쓰는 과정을 가르칠 뿐이고 아무 곳에서도 시원하고 확실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인간의 기원, 인간의 타락과 죄의 기원, 그리고,
하나님의 웅장하고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 의존의 사색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기 자신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기록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감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영접함으로써 생겨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타락과정과 죄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 과정에서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할 줄을 아시면서도 선악과를 만들었는가 라고 합니다.

또 간교한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이 무슨 목적으로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별로 문제 될 것도 없이 이 본문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인간의 타락은 역사적 사건이며 그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었을 뿐 아니라 복을 주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음 받은 피조물인고로 언제라도 유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인간은 그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인간은 그를 경배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은 바로 여기를 헤집고 들어간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유혹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선악과의 의미나 뱀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피조 본능을 알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유혹에서 인간의 타락을 봅니다. 뱀이 여자에게 유혹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3:5절)고 했습니다.

선악과에 대한 호기심보다 더 큰 것은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욕망 때문에 선악과를 딴 것입니다. 창조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완전한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 바로 타락의 동기였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죄와 타락은 창조질서의 파괴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어야 하고 인간은 인간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고 창조주와 피조물을 뒤죽박죽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하와도 아담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어쩌면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죄는 도덕적,

윤리적인 것 보다 철저히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버린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고,인간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른바 뉴에이지운동에서 보듯 인간이 곧 하나님이며,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이며 인간의 비극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존과 죄의 실존에 대해서 너무나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선악과를 따먹은 동기는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되었다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죄는 실수도 아니고 단순히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정도가 아니고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부숴버리고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처럼 되려는 패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진리의 핵심은 인간이 타락의 실체를 인정하고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회복은 인간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창세기 3장의 내용이자 신구약 성경의 기본골격입니다.

그런데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보면 여자가 사탄의 유혹을 받을 때에 느낌이 6절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나무의 실과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탄의 유혹을 긍정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선악과를 보는 입장도 달라졌습니다.
어떤 행동이든지 그것은 이미 마음의 결심이 섰을 때 되어집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합리적으로 유도했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다는 표현은 적절합니다.

어떤 이는 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욕구 그 자체를 죄인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먹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하고,
지혜롭게 되려는 인간의 욕구 그 자체는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져야 하지만 자기 자신의 욕구 충족이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으면서 인간의 욕구를 죄 짓는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를 찬양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사탄의 유혹으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 때문에 타락했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진 것이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으며 그 결과 죄책과 부끄러움 때문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죄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게 했습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나무사이에 숨은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이세상 어디에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단 말입니까? 이세상 아무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면서 “네
가 어디 있느냐”라고 찾으십니다. 이것은 죄로 어두워지고 타락한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부르심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는 인생을 향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곧 우리에게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고 찾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며 기독교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발버둥이나, 성경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무 아래 숨었든지 사무실에 숨었든지 처절한 절망의 늪에 있든지 간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아멘 하면서 나오십시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아담처럼 무슨 변명을 하지 마십시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핑계를 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결론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과 자기 힘으로 구속받을 수 없음을 아시고 위대한 구속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뱀 곧 사탄을 저주하는 중에 하나님의 계획을 자연스럽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3:15절)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이른바 원시복음이라 하여 장차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으로 말미암아 발꿈치를 상하는 것 같은 십자가의 고통이 있지만 결국 사탄을 정복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장차 여인의 후손, 곧 메시아를 보내서 사탄을 정복하고 인생들을 구속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운동의 기본 틀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 기본 구조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한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소망이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구원을 약속했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이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절)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의의 옷으로 우리의 염치없고 부끄러운 것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의 재료는 양의 가죽이었습니다. 양의 희생을 통해서만 의의 옷 곧 가죽옷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흐름은 어린양의 희생(犧牲)을 통해서만 인간(人間)의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핵심(核心)입니다.

그 어린양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 피를 믿는 자는 가죽옷 곧 의의 옷을 입은 자입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시고 우리를 구속했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이라는 진리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게 영광돌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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