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救援)으로 가는 길
행24:1-27절, 182.199.253장.&
오늘 아침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 타락한 유대의 교권과 정권이 야합해서 사도 바울을 고소 고발하는 사건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대해서 바울의 명쾌한 변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진리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24장을 크게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이 변사 더둘로를 앞장 세워서 사도 바울을 고소했습니다(24:1-9절). 그리고 그 고발에 대해서 바울의 변호가 있고(24:10-21절) 그 다음은 우유부단하고 양심불량이며 요즈음 말로 비자금조성의 대표 정치가 벨릭스의 직무태만으로 2년간 바울이 옥고를 치룬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면 부패한 교권자들의 눈에 의인은 눈에 가시처럼 비추어져서 사도 바울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계의 거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그를 추종하는 장로들과 더불어 바울을 정죄하여 죽이려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와서 벨릭스 총독 앞에 와서 고소 고발조치를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범죄를 조작하기 위하여 법정 대리인이요 율법사 출신,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담당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서 바울을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고소했습니다. 불의를 대변하자니 그의 논리전개 방식은 억지였고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첨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법적으로 고발하기 보다는 욕설로서 규탄하고 인신공격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 고소 내용을 성경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감사 무지하옵나이다"(24:3절)라고 아첨했습니다.
식민지 지배 하에 있는 유대인 변호사가 이 정도였으니 할 말을 잊었습니다. 자기의 동족이며 정통 유대인이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바울이 저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민족적 양심을 팔아 먹은 것입니다.
마치 일제에 아부하고 일본 총독에게 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세력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마치 진리를 바로 지키고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거부한 지도자를 거짓 지도자들이 참된 종들을 순교하도록 이끌었던 것과 흡사했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벨릭스에게 할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함으로 그의 마음을 돌려 바울을 로마법에 따라서 사형시키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에 대해서 최대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24:5)고 몰아 세웠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더둘로는 이성을 잃고 있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일본 제국주의 자들의 통치시대에 일본 헌병이나 경찰 못지않게 한국인들이 우리 동족을 고발 고소 처형시키는데 앞장섰던 것을 회상하면 이 상황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내용을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바울은 가이사를 반역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천하를 소요케한 장본인이며 온 천하를 대표하는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정치적 발언으로 벨릭스 총독의 마음을 사고 국법문란죄 또는 국가 전복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을 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사회에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인 동시에, 반율법적 신앙을 전파하는 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셋째는 바울은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당시의 법으로는 이방인 성전에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서 성전을 불경스럽게 했다는 죄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종 바울은 이토록 처참하리만큼 동족(同族)의 고소(告訴)를 받았습니다.
이런 환난과 핍박과 고생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동족이 동족을 고발하고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서로 질투하고, 대개는 동업자끼리 질투, 시기하기 마련입니다. 해외에 나가면 우리 민족끼리 서로 잡아 먹으려고 하고, 교회끼리 서로 욕하고,
정치가는 정치가(政治家)끼리 말 그대로 개들이 흙탕물에서 싸움질하는 것 같은 오늘의 상황(狀況)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욕설을 먹고. 고소(告訴) 고발(告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을 그 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더 큰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좋은 기회를 가지게 했던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갔다기 보다는 도리어 타의에 의하여 높은 곳, 낮은 곳, 넓은 곳, 좁은 곳 할 것 없이 끌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바울이 개종 후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절)고,
말씀하셨던 대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가면 그 곳은 개인전도의 장소가 되었고 시장터에 가면 거기서 설교할 기회를 얻었고 이방인에게 가면 이방인(異邦人)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끌려 다니던 때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로마 군병에게 끌려 다닐 때는 그들에게 복음을, 총독 앞에 섰을 때 그 자리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장소, 어떤 일감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있는 그 곳에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우리가 있는 그곳에 주의 은혜와 도움과 위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핍박도 고생도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열악하고 불행한 일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시며 우리에게 한량없는 위로와 교훈을 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더둘로의 저질의 욕설과 아첨의 말, 그리고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는 고소 고발에 대해서 총독은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바울은 논리정연하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사실 이 변론의 기회는 총독 벨릭스가 주었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이 바울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를 맞으면 곧 그 위기를 발전시켜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얼른 보면 벨릭스는 바울에 대해서 많은 호의를 베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요즈음 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 여러 방편으로 강온의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본문25-26절에 보면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이같이 이야기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들의 하는 짓들입니다. 성경은 벌써 말했습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만 참되시다고 말입니다.(롬3:4절).
인간을 믿는 것이 잘못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삼위 하나님 뿐입니다. 최근에 울분을 터뜨리고 흥분하는 사람 많지만 돌팔매 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세탁을 잘해도 양심세탁을 안하면 인간의 종말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보다 우리 성도들 먼저 신앙세탁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바울은 변호의 기회를 갖고 차분히 말했습니다. 첫째는 바울은 첫번 고소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적인 평화를 깬 적이 없고 소동을 목적으로 군중집회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고발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이방 성도들의 헌금을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함이었음을 밝혔습니다. 둘째는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 법대로 섬겼지 조상들의 신앙에 절대로 위배되지 않았다는 것을 변증하고 오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는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셋째는 바울은 고소자들이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 들어간 것은 유대인의 결례를 준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아첨과 욕설로 일관된 것이 었으나 바울의 변화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진리는 너무나 떳떳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소자 쪽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무죄였습니다. 바울은 상대가 욕한다고 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참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되고 오직 믿음만이 승리한다는 확신의 변론을 제기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말하자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함축적으로 외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부터라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에게서 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지도자들이 말한 대로 나사렛 이단의 괴수임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이 소위 유대인들이 이단으로 몰고 갔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두렵게 생각지 않는,
참된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 초석을 만들었습니다. 환난 핍박이 아무리 강해도 복음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결국 복음은 더욱 넓게 크게 멀리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이 무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중인격의 총독 벨릭스는 까닭없이 바울을 2년간이나 옥에 가두었습니다.
물론 이 일로 말미암아 옥중에서 도리어 바울은 영육간에 아울러 쉬게 되었고 재충전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헤롯도 있고, 바로도 있고, 히틀러도 있고, 무솔리니도 있습니다. 오늘날에 빌라도도 있고 벨릭스도 있습니다.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지도자만 문제있고 민중은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말하면 안됩니다.
지도자의 힘이 절대적이 아니듯이 민중의 힘도 절대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부패했음으로 제왕적 대통령도 문제지만, 민중과 민초는 깨끗하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울의 무죄승소를 통해 복음이 더 넓게 증거되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를 심판하시며 섭리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좇아 따르므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24:1-27절, 182.199.253장.&
오늘 아침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을 보면 타락한 유대의 교권과 정권이 야합해서 사도 바울을 고소 고발하는 사건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의 고소 고발에 대해서 바울의 명쾌한 변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놀라운 진리와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24장을 크게 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어떤, 장로들이 변사 더둘로를 앞장 세워서 사도 바울을 고소했습니다(24:1-9절). 그리고 그 고발에 대해서 바울의 변호가 있고(24:10-21절) 그 다음은 우유부단하고 양심불량이며 요즈음 말로 비자금조성의 대표 정치가 벨릭스의 직무태만으로 2년간 바울이 옥고를 치룬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면 부패한 교권자들의 눈에 의인은 눈에 가시처럼 비추어져서 사도 바울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계의 거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그를 추종하는 장로들과 더불어 바울을 정죄하여 죽이려고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와서 벨릭스 총독 앞에 와서 고소 고발조치를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범죄를 조작하기 위하여 법정 대리인이요 율법사 출신,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담당변호사 더둘로를 앞세워서 바울을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게 고소했습니다. 불의를 대변하자니 그의 논리전개 방식은 억지였고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아첨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법적으로 고발하기 보다는 욕설로서 규탄하고 인신공격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 고소 내용을 성경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감사 무지하옵나이다"(24:3절)라고 아첨했습니다.
식민지 지배 하에 있는 유대인 변호사가 이 정도였으니 할 말을 잊었습니다. 자기의 동족이며 정통 유대인이며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바울이 저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민족적 양심을 팔아 먹은 것입니다.
마치 일제에 아부하고 일본 총독에게 나라를 팔아 먹은 친일파 세력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마치 진리를 바로 지키고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거부한 지도자를 거짓 지도자들이 참된 종들을 순교하도록 이끌었던 것과 흡사했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벨릭스에게 할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함으로 그의 마음을 돌려 바울을 로마법에 따라서 사형시키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에 대해서 최대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24:5)고 몰아 세웠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더둘로는 이성을 잃고 있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일본 제국주의 자들의 통치시대에 일본 헌병이나 경찰 못지않게 한국인들이 우리 동족을 고발 고소 처형시키는데 앞장섰던 것을 회상하면 이 상황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내용을 정리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바울은 가이사를 반역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천하를 소요케한 장본인이며 온 천하를 대표하는 가이사 황제를 반역하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정치적 발언으로 벨릭스 총독의 마음을 사고 국법문란죄 또는 국가 전복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을 범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사회에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인 동시에, 반율법적 신앙을 전파하는 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셋째는 바울은 성전을 더럽혔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당시의 법으로는 이방인 성전에 들어갈 수 없도록 되어 있는데 바울은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서 성전을 불경스럽게 했다는 죄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종 바울은 이토록 처참하리만큼 동족(同族)의 고소(告訴)를 받았습니다.
이런 환난과 핍박과 고생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동족이 동족을 고발하고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서로 질투하고, 대개는 동업자끼리 질투, 시기하기 마련입니다. 해외에 나가면 우리 민족끼리 서로 잡아 먹으려고 하고, 교회끼리 서로 욕하고,
정치가는 정치가(政治家)끼리 말 그대로 개들이 흙탕물에서 싸움질하는 것 같은 오늘의 상황(狀況)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욕설을 먹고. 고소(告訴) 고발(告發)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을 그 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더 큰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좋은 기회를 가지게 했던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갔다기 보다는 도리어 타의에 의하여 높은 곳, 낮은 곳, 넓은 곳, 좁은 곳 할 것 없이 끌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바울이 개종 후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절)고,
말씀하셨던 대로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가면 그 곳은 개인전도의 장소가 되었고 시장터에 가면 거기서 설교할 기회를 얻었고 이방인에게 가면 이방인(異邦人)에게 전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끌려 다니던 때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로마 군병에게 끌려 다닐 때는 그들에게 복음을, 총독 앞에 섰을 때 그 자리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장소, 어떤 일감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있는 그 곳에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우리가 있는 그곳에 주의 은혜와 도움과 위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도 핍박도 고생도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는 가장 열악하고 불행한 일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시며 우리에게 한량없는 위로와 교훈을 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더둘로의 저질의 욕설과 아첨의 말, 그리고 바울의 인격을 모독하는 고소 고발에 대해서 총독은 바울에게 변호할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바울은 논리정연하게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사실 이 변론의 기회는 총독 벨릭스가 주었다기 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이 바울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를 맞으면 곧 그 위기를 발전시켜서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얼른 보면 벨릭스는 바울에 대해서 많은 호의를 베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요즈음 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돈을 받기 위해서 여러 방편으로 강온의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본문25-26절에 보면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이같이 이야기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들의 하는 짓들입니다. 성경은 벌써 말했습니다. 인간은 다 거짓되지만 하나님만 참되시다고 말입니다.(롬3:4절).
인간을 믿는 것이 잘못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삼위 하나님 뿐입니다. 최근에 울분을 터뜨리고 흥분하는 사람 많지만 돌팔매 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세탁을 잘해도 양심세탁을 안하면 인간의 종말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보다 우리 성도들 먼저 신앙세탁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바울은 변호의 기회를 갖고 차분히 말했습니다. 첫째는 바울은 첫번 고소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적인 평화를 깬 적이 없고 소동을 목적으로 군중집회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고발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이방 성도들의 헌금을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함이었음을 밝혔습니다. 둘째는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을 그 법대로 섬겼지 조상들의 신앙에 절대로 위배되지 않았다는 것을 변증하고 오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는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셋째는 바울은 고소자들이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바울이 성전에 들어간 것은 유대인의 결례를 준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변사 더둘로는 아첨과 욕설로 일관된 것이 었으나 바울의 변화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진리는 너무나 떳떳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소자 쪽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무죄였습니다. 바울은 상대가 욕한다고 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성경만이 참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되고 오직 믿음만이 승리한다는 확신의 변론을 제기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말하자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함축적으로 외친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부터라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에게서 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지도자들이 말한 대로 나사렛 이단의 괴수임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이 소위 유대인들이 이단으로 몰고 갔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위해서 생명을 조금도 두렵게 생각지 않는,
참된 기독교 신앙의 교리적 초석을 만들었습니다. 환난 핍박이 아무리 강해도 복음은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결국 복음은 더욱 넓게 크게 멀리 확장되었습니다. 바울이 무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중인격의 총독 벨릭스는 까닭없이 바울을 2년간이나 옥에 가두었습니다.
물론 이 일로 말미암아 옥중에서 도리어 바울은 영육간에 아울러 쉬게 되었고 재충전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헤롯도 있고, 바로도 있고, 히틀러도 있고, 무솔리니도 있습니다. 오늘날에 빌라도도 있고 벨릭스도 있습니다.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지도자만 문제있고 민중은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말하면 안됩니다.
지도자의 힘이 절대적이 아니듯이 민중의 힘도 절대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부패했음으로 제왕적 대통령도 문제지만, 민중과 민초는 깨끗하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울의 무죄승소를 통해 복음이 더 넓게 증거되고 그 배후에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를 심판하시며 섭리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좇아 따르므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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