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치는 무리들.
행25:13-27절, 253.259.265장&
오늘 본문을 보면 베스도가 아그립바왕에게 바울에 대한 고소사건 내용을 설명하면서 19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두말 할 필요었이 베스도는 사도 바울의 무죄함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의 종교 곧 유대교, 또는 바리새교인 옛종교와 새종교 곧 예수교 또는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임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예수교의 참뜻을 이해한다면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메시지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전후좌우를 깊이 살피면서 본문의 계시가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단락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베스도가 벨릭스의 뒤를 이어 총독으로 부임한지 사흘 만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유대의 대제사장과 고급 관료들이 이미 2년 전에 투옥된 바울의 사건을 들고 나오면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저의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매복했다가 암살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베스도는 그것을 허락치 않고 고소자들이 가이사랴에 내려와서 고소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베스도를 통해서 바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재판의 결과는 바울이 무죄였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기를 희망하느냐고 묻자 바울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기에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로 확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베스도가 바울을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이송하기로 결정은 했으나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도 없는 사람을 총독이 황제에게 재판하라고 보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칫 정치적으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한 파면당할 위험까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유대를 통치하고 있는 로마의 분봉왕인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려고 가이사랴에 왔던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으로서는 유대인 출신의 아그립바왕에게 지금까지 바울 사건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의 설립 과정에서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서의 유대의 헤롯왕조와의 얽힌 내용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그립바는 이른바 아그립바 2세로서 헤롯왕조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의 증조부요. 그 왕조의 창시자인 헤롯대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유대 전역에 두살 이하의 어린이를 학살하는 대 참극을 연출한 자였습니다. 헤롯의 아들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목 베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여우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살해 했으며 민중들의 지지를 얻자 베드로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흥미있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복음을 박대하던 이들 왕들은 하나같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아그립바 1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벌레가 먹어 죽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나타난 아그립바 2세는 바울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묘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그립바의 권한은 왕으로서 성전 책임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까지 임명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의 봉신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면서도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꼭두각시 놀음을 해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도덕의 극치를 이루는 왕이었습니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 버니게는 총독 벨릭스의 아내인 드루실라의 자매였고 동시에 아그립바 2세의 친남매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녀의 친삼촌인 헤롯과 결혼하였다가 그를 버리고 다시 폰레몬과 결혼했고,
아그립바 2세와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죄악(罪惡)된 생활(生活)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부도덕(不道德)한 정권(政權) 앞에 사도 바울이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일단 바울을 그 쪽으로 넘겨서 책임을 면하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불의하고 부도덕한 정권을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역사(役事)의 심판(審判)이란 말을 쓰지만 사실(事實)은 역사(役事)를 주관(主管)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世俗) 정권(政權)만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된 종교(宗敎), 세속화된 교회, 인본주의적인 기독교도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 비자금 사건으로 빚어진 메카톤급 사건들도,
결국 불의(不義)와 부정(否定)은 숨길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베스도는 아그립바왕에게 바울 사건(事件)에 대한 경과보고(經過報告)를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로마의 총독답게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므로 로마법에 따라서 피고가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중(二重)언어(言語)를 할 줄 알고 이중국적을 가졌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특별히 뽑은 인물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베스도는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의 고소 고발 내용이"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스도로서는 실로 난감한 문제였고 이것은 고소할 사건이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실 베스도의 이 말은 오늘 본문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른바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종교 곧 유대교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을 믿는 예수교 사이에 대립을 보게 됩니다.
종교문제를 세상 법정에 재판을 의뢰해서 승부를 보겠다는 발상자체가 유대지도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생명(生命)의 복음(福音), 부활의 복음, 은총의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약한 자였으나 바울이 가진 복음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그마한 외모에 못생기고 볼품없는 초라한 풍채였으나 그가 가진 복음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생명의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상한 심령들이 고침을 받고, 죄악된 사람들이 구원을 얻으며 연약한 심령들이 큰 능력을 받고 변하여 새 사람되고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세상이 변하고,
민족이 변하고 국가가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복음이 무엇이 그렇게도 위대하길래 로마 황제에게까지 가서 전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교요 기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예수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교란 예수의 가르친 교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산상보훈에 나타난 설교와 교훈의 말씀 위에 기독교는 존재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믿되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뽑아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성경구절(聖經句節)을 묵상하고 받아 들이는 것을 예수교 기독교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당시의 종교 곧 유대교라고 하기도 하지만 바리새교는 구약의 종교에서 세속화되고 인본주의화 되어서 율법주의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미신에 가까운 종교요 하나님 중심의 종교가 아닌 인간중심의 종교, 법조문에 얽혀 있는 종교였으며, 하나의 윤리적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구약의 종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땅위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과 구약의 내용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신구약이 모두 은혜로 구원얻고 믿음으로 구원얻고 하나님 말씀이 신앙과 삶의 표준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탄생하시기 전부터 유대교는 성경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도리어 구주로 오신 메시야인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도 모자라서 예수의 제자들을 죽이고 박해하며 아예 예수의 그림자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버리고 복음이 이방인에게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뽑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있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정권과 교권이 다 달라 붙어도 바울을 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붙들고 있는 한 절대로 실패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떼시면 인간은 별 수 었이 멸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의 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요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절)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15:14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스도가 개요한 예수교의 인식은 옳았습니다.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믿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안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성도(聖徒)들 가운데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의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교 곧 기독교(基督敎)의 복음(福音)의 핵심(核心)은 예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으심과 부활(復活)을 동시(同時)에 믿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十字架)는 무의미합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바탕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존재합니다. 예수의 부활없이 어떻게 교회가 존재할 수 있으며, 예수의 부활이 없는 신학은 모두 거짓된 신학입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환상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록 로마 총독이 아그립바왕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설명된 것이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한 객관적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옛사람이 온전히 포기되고 나의 교만과 탐욕과 거짓과 불신의 사람이 죽어져야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시고 다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힘있게 붙들기를 바랍니다.
이 신앙으로 능히 죄와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 되어서 주님의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행25:13-27절, 253.259.265장&
오늘 본문을 보면 베스도가 아그립바왕에게 바울에 대한 고소사건 내용을 설명하면서 19절에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두말 할 필요었이 베스도는 사도 바울의 무죄함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의 종교 곧 유대교, 또는 바리새교인 옛종교와 새종교 곧 예수교 또는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임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예수교의 참뜻을 이해한다면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메시지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전후좌우를 깊이 살피면서 본문의 계시가 오늘 이 시간에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단락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베스도가 벨릭스의 뒤를 이어 총독으로 부임한지 사흘 만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유대의 대제사장과 고급 관료들이 이미 2년 전에 투옥된 바울의 사건을 들고 나오면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저의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이송되는 도중에 매복했다가 암살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베스도는 그것을 허락치 않고 고소자들이 가이사랴에 내려와서 고소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베스도를 통해서 바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재판의 결과는 바울이 무죄였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재판을 받기를 희망하느냐고 묻자 바울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스도는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기에 그를 가이사에게 보내기로 확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베스도가 바울을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이송하기로 결정은 했으나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도 없는 사람을 총독이 황제에게 재판하라고 보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자칫 정치적으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한 파면당할 위험까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베스도가 바울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유대를 통치하고 있는 로마의 분봉왕인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하려고 가이사랴에 왔던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으로서는 유대인 출신의 아그립바왕에게 지금까지 바울 사건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초대교회의 설립 과정에서 로마의 식민 통치하에서의 유대의 헤롯왕조와의 얽힌 내용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그립바는 이른바 아그립바 2세로서 헤롯왕조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의 증조부요. 그 왕조의 창시자인 헤롯대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유대 전역에 두살 이하의 어린이를 학살하는 대 참극을 연출한 자였습니다. 헤롯의 아들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목 베었고, 예수님으로부터 여우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살해 했으며 민중들의 지지를 얻자 베드로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흥미있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복음을 박대하던 이들 왕들은 하나같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아그립바 1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벌레가 먹어 죽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나타난 아그립바 2세는 바울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묘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그립바의 권한은 왕으로서 성전 책임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까지 임명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로마 황제의 봉신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면서도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하는 꼭두각시 놀음을 해야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도덕의 극치를 이루는 왕이었습니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 버니게는 총독 벨릭스의 아내인 드루실라의 자매였고 동시에 아그립바 2세의 친남매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인은 그녀의 친삼촌인 헤롯과 결혼하였다가 그를 버리고 다시 폰레몬과 결혼했고,
아그립바 2세와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죄악(罪惡)된 생활(生活)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부도덕(不道德)한 정권(政權) 앞에 사도 바울이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일단 바울을 그 쪽으로 넘겨서 책임을 면하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불의하고 부도덕한 정권을 하나님께서 심판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역사(役事)의 심판(審判)이란 말을 쓰지만 사실(事實)은 역사(役事)를 주관(主管)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世俗) 정권(政權)만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거짓된 종교(宗敎), 세속화된 교회, 인본주의적인 기독교도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에 비자금 사건으로 빚어진 메카톤급 사건들도,
결국 불의(不義)와 부정(否定)은 숨길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베스도는 아그립바왕에게 바울 사건(事件)에 대한 경과보고(經過報告)를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로마의 총독답게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이므로 로마법에 따라서 피고가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중(二重)언어(言語)를 할 줄 알고 이중국적을 가졌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특별히 뽑은 인물이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베스도는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의 고소 고발 내용이"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스도로서는 실로 난감한 문제였고 이것은 고소할 사건이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실 베스도의 이 말은 오늘 본문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른바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종교 곧 유대교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을 믿는 예수교 사이에 대립을 보게 됩니다.
종교문제를 세상 법정에 재판을 의뢰해서 승부를 보겠다는 발상자체가 유대지도자들의 파렴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생명(生命)의 복음(福音), 부활의 복음, 은총의 복음이 확장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약한 자였으나 바울이 가진 복음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그마한 외모에 못생기고 볼품없는 초라한 풍채였으나 그가 가진 복음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생명의 복음이었습니다.
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상한 심령들이 고침을 받고, 죄악된 사람들이 구원을 얻으며 연약한 심령들이 큰 능력을 받고 변하여 새 사람되고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세상이 변하고,
민족이 변하고 국가가 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복음이 무엇이 그렇게도 위대하길래 로마 황제에게까지 가서 전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교요 기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 예수교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교란 예수의 가르친 교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산상보훈에 나타난 설교와 교훈의 말씀 위에 기독교는 존재한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믿되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과 초자연적인 것을 다 뽑아 버리고 자기가 원하는 성경구절(聖經句節)을 묵상하고 받아 들이는 것을 예수교 기독교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당시의 종교 곧 유대교라고 하기도 하지만 바리새교는 구약의 종교에서 세속화되고 인본주의화 되어서 율법주의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미신에 가까운 종교요 하나님 중심의 종교가 아닌 인간중심의 종교, 법조문에 얽혀 있는 종교였으며, 하나의 윤리적 종교로 전락했습니다.
구약의 종교는 장차 오실 메시야가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땅위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과 구약의 내용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신구약이 모두 은혜로 구원얻고 믿음으로 구원얻고 하나님 말씀이 신앙과 삶의 표준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탄생하시기 전부터 유대교는 성경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도리어 구주로 오신 메시야인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도 모자라서 예수의 제자들을 죽이고 박해하며 아예 예수의 그림자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유대인들을 버리고 복음이 이방인에게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뽑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있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정권과 교권이 다 달라 붙어도 바울을 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붙들고 있는 한 절대로 실패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손떼시면 인간은 별 수 었이 멸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가진 복음의 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요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도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절)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15:14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스도가 개요한 예수교의 인식은 옳았습니다. 바울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믿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안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성도(聖徒)들 가운데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의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교 곧 기독교(基督敎)의 복음(福音)의 핵심(核心)은 예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으심과 부활(復活)을 동시(同時)에 믿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十字架)는 무의미합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바탕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존재합니다. 예수의 부활없이 어떻게 교회가 존재할 수 있으며, 예수의 부활이 없는 신학은 모두 거짓된 신학입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환상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록 로마 총독이 아그립바왕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설명된 것이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한 객관적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옛사람이 온전히 포기되고 나의 교만과 탐욕과 거짓과 불신의 사람이 죽어져야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시고 다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힘있게 붙들기를 바랍니다.
이 신앙으로 능히 죄와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 되어서 주님의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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