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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떠들지말라 저에게 생명이 있다. (행20:1-16절),

대산지기 2007. 2. 8. 10:40
떠들지말라 저에게 생명이 있다.
행20:1-16절, 210.183.217장.&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청년 유두고가 삼층 창가에서 분명히 떨어져 죽었는데도 사도 바울은 죽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행9:27절)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를 보고 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의 통로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또 요3:36절에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요11:25-26절에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챤들의 생사관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그리고 사나 죽으나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죽은 유두고를 보고 생명이 저에게 있다는 말은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진리의 종교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피면서 본문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를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 본문을 접근함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구절을 흔히 유두고 사건이라고 합니다만, 이 말씀의 메시지는 유두고에 있지 않고,

바울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또 하나님이 바울을 쓰실 때 그에게 말씀과 권능을 함께 들려 주셨다는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이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의 행위와 유두고 사건을 통해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단락의 메시지였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강렬한 바울의 설교 때문에 에베소 사람들 사이에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해서 강렬한 데모가 벌어졌습니다. 그때 서기장이 겨우 데모를 진정시킨 후부터 20장이 시작됩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소요가 그치자 제자들을 불러서 권면한 후에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뱃길로 빌립보로 갔으며 계속해서 고린도와 베뢰아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1절에 있는 대로 바울이 제자들을 많이 권면했다는 간단한 표현 뿐입니다.

그런데 권면이란 말은 참으로 함축하는 바가 많은 단어입니다. 이 말은 보혜사라는 말의 헬라어 단어와 같은 뿌리의 말입니다. 위로, 옹호의 뜻을 가집니다. 바울은 박해를 많이 받고 고생했던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들을 옹호하는 말씀을 주었습니다.

고통과 아픔이 많았던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말씀, 변호의 말씀보다 더 큰 것이 없을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위로자 곧 보혜사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시며 권면이 되십니다. 바울은 선교사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니 만큼 성도들의 고난이 무엇이며 괴로움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환난과 시험을 당한 자에게는 위로의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보다도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핍박받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때를 따라 우리에게,말씀으로 주의 종들을 통해서 권면할 때 그것을 아멘으로 받으시면 큰 은혜와 위로와 축복이 될 것 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에는 환영보다 적대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어디든지 복음의 반역자들이 나타나서 구체적으로 바울을 핍박하고 복음전도에 방해를 놨습니다.

어쩌면 정말 위로가 필요한 자는 바울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하고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주님의, 위로와 권능이 직접 나타나서 주님이 살아계심과 복음운동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7절에서 12절까지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은 일주일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떡을 떼고 사도의 교훈을 듣기 위한 첫날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집회는 안식 후 첫 날 곧 오늘날 주일이었습니다. 이미 유대교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으나,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을 예배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주의 종교에서 은총의 종교로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로 바뀌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됩니다 계1:10절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란 표현은 이미 A.D 90년경에 주일이 보편적으로 지켜졌고 인식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그 주일에 예배가 있었고 사도 바울은 일일 부흥회로서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 설교는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튿날 바울이 떠나려고 했을 때 설교자 바울이나 청중 모두가 말씀을 아쉬워 하면서 단 몇시간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 집회는 밤 늦게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청중들 가운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설교하는 도중에 창가에 걸터 앉아서 처음부터 졸고 있다가 잠에 취해서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입니다. 한 사람의 실수로 예배 끝시간을 엉망으로 만든 사건이며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청년이 창가에 걸터 앉아서 처음부터 졸고 있다는 자체가 예배자로서 또는 은혜 받은 자의 태도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좌석이 부족해서 창가에 걸터 앉을 수 밖에 없는지 아니면 못된 버릇으로 그러했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또 설교가 밤 늦게까지 계속되었기에 졸음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하여간 이 본문의 기록자인 누가의 말 그대로 이해하면 족할 줄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예배태도를 한번 되돌아 보는 것도 유익할 줄 압니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되 집단적인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예배태도는 고쳐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시간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면 예배 약속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드린다고 하지만 실상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친구끼리는 약 5분 정도 늦어지면 "미안해"한 마디로 통하지만 손위 어른이나 스승과의 약속이라면 최소한 5분 정도는 먼저 나와 있는 것이 예의가 됩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만나려면 적어도 몇 시간 전에 나와서 준비하고 몸과 마음을 준비합니다.

그렇다면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만드신 하나님, 우리의 구주가 되신 하나님을 예배(禮拜)한다면서 이렇게 불성실하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배에 대한 인식의 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교통사정(交通事情)이 어려운 것도 알고 각각 처지가 다르고 가정형편이 다른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토요일은 반공일이 아니고 주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날이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마음도 몸도 헌물도 미리 잘 준비해야 합니다.

청년 유두고는 설교시간이 길어져서 잠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졸았습니다. 그에게는 말씀이 귀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똑 같은 메시지를 들어도 예배의 태도와 그의 영적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성도들은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해야 마땅합니다.

요즈음 예배시간은 대개 1시간 정도입니다. 설교시간은 20분에서 25분 정도입니다. 옛날에 우리 한국교회 어떤 부흥회는 설교를 7시간 했다는 기록(記錄)이 있습니다. 지금도 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나라 가운데는 예배(禮拜)를 다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까지 드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너무나 편리주의, 편의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가 많이 들어 왔습니다. 한 시간의 예배도 지루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설교자의 책임도 있지만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 섰다는 신전의식이 없이 겉 모양으로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30분 전에는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와 묵상으로 예배준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물붓듯이 쏟아주실 줄 믿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죽은 청년 유두고를 끌어안고 바울은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하면서 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유두고가 살아날 것을 확실히 믿었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잠으로 보며 죽은 자의 부활되시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바울은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안심 시켰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권능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런 초자연적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은 바울이 청년 유두고를 살린 것은 단순히 그를 살리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은혜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결국은 복음의 승리를 위한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허무주의 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소유한 자만이 죽음을 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잠으로 볼 때만이 죽음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줄 아는 소망으로 가슴이 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삶 전부를 드리는 참된 예배, 신령한 예배, 경건한 예배 훈련이 있어야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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