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5:13절, 154.155.157장.-3927 Bible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19세기 이성주의자(理性主義者)인 벤틀리 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기 위해 가사설(假死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지 않고 기절했다가 무덤에 들어가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기력(氣力)을 회복(回復)했다는 학설(學說)입니다. 하지만 성경(聖經)은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신 뒤. 땅에 내려져서 로마 군병(軍兵)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3일 만에 온전한 육신(肉身)을 입고 부활(復活)하셨
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부활(復活) 신앙(信仰)은 굳이 신약(信約)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구약(舊約)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는 구약(舊約) 신앙(信仰)인들의 부활(復活) 신앙(信仰)에 대해 살펴보며 은혜(恩惠)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초림(初臨)하시기 이미 1,500-2,000년 전에도 부활(復活) 신앙(信仰)을 가진,
훌륭한 성도(聖徒)들이 있었다면 실제(實題)로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이 있은 지 2,000년이 지난 오늘날도 부활(復活) 신앙(信仰)을 가지지 못하는 자들은 정말 어리석고 부끄러운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1.모세의 부활(復活) 신앙(信仰)입니다. 신32:39절에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1)하나님만이 생명(生命)의 주관자(主管者)이십니다. 모세는 광야(廣野) 생활(生活)을 마감하면서 요단 동편 모압 평지(平地)에서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을 가리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 하고, 낫게도 하는 분이시라 하였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모든 피조물의 호흡과 생명을 주신 분이 세상 피조물을 죽이고 살리는 권한과 능력이 없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활의 영광에 들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부활의 하나님을 믿읍시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놓치지 맙시다.
2)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생명을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는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자를 살릴 자가 없으며, 살리기도 결심한 자를 죽일 자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송사하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롬8:33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繼續)해서 사망(死亡)도, 생명(生命)도, 천사(天使)도, 권세(權勢)자(者)도, 다른 아무 피조물(被造物)도 성도(聖徒)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노라고 단언(端言)하였습니다.
롬8:38,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할진대 이미 보장(保障)받은 성도(聖徒)의 부활(復活)과 영생(永生)의 소망(素望)을 제거(除去)할 자는 세상(世上)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自信)과 확신(確信)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聖徒)들이 됩시다.
2.다윗의 부활(復活) 신앙(信仰)입니다. 시16:10절에 “이는 내 영혼(靈魂)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1)죽어도 버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다윗 자신이 죽음의 상황에 직면해도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는다는 다윗의 부활 신앙을 보여줍니다.
실로 죽음은 죄의 결과요, 저주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죽음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존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비록 육신은 죽어 땅에 묻힐지라도 언젠가는 부활시키시고, 당신의 영광스런 나라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성도(聖徒)는 이런 특권(特權)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성도(聖徒)는 죽으나 사나 항상(恒常) 하나님이 소유(所有)요, 하나님의 보호(保護)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는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말입니다.
2)다시는 육신(肉身)이 썩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自身)을 결코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 고백(告白)하였습니다. 이 말은 육신(肉身)의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비록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주시고 그 후에는 두 번 다시 육신이 썩지 않도록 신령(神鈴)한 몸을 입혀 주신다는 신앙고백(信仰告白)인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告白)은 마치 신약에서 부활 교리를 가르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연상시키는 듯합니다.
고전 15:44절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부활 후에는 영원히 죽지도, 육신이 썩지도 않는 신령한 육신을 입게 된다는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이 육신은 연약하여 죽기도 하고 썩기도 하지만, 다시 부활한 후의 육신은 마치 범죄(犯罪)하기 전의 아담 하와와 같이, 혹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거룩하고 신령하며,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으니 이 한 몸 주님 위해 아낌없이 충성을 다합시다.
3.욥의 부활 신앙입니다. 욥19:27절에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했습니다.
1)직접(直接) 하나님 만나기를 소망(素望)합니다. 욥은 자신이 죽은 후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직접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곧 육신의 죽음을 맞은 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부활의 확신이요, 소망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기에 욥은 아무리 무고하게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원망치 않았고, 불평 불만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 부활하여 하나님을 만날 소망이 있다면 지금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怨望)할 수 없습니다. 어찌 입술로 불평(不評) 불만(不滿)을 토로하고 또 그 입술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편에 속합니까? 원망하기를 더 자주합니까?
2)속히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 뵐 간절한 생각에, “내 마음이 초급(超急)하구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고, 시간이 너무 더디 가서 답답해 견딜 수 없다는,
욥의 고백은 오늘날 부활 신앙을 가졌노라 자부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여러분은 정말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 싶은 간절한 생각 때문에 안타깝고 조급하며, 답답함을 느껴 보셨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이런 갈급함이 충만해야 합니다. 이러한 갈급한 심령으로 사모하며 신앙생활 할 때에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기도드릴 수가 있습니다.
4.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 시대에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세 사람을 만나보았습니다. 첫째는 모세의 부활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둘째는 다윗의 부활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셋째는 욥의 부활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신약 시대에만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부활신앙을 소유하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부활이 내 부활이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과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