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라. (창32:20-32절)

대산지기 2008. 2. 28. 15:25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르라.
창32:20-32절, 210. 214. 253. 496장&

남북대화의 물고를 트게한 정주영씨의 소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서 북한 땅에 있는 고향으로 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남북을 오가더니 그 후속조치로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고 고향을 그리워하던 실향민들에게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북 정상이 대화를 하게 되었고 이산가족이 한 차례 서울과 평양에서 50년만에 만나 부등켜안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관계장관들이 오가며 대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정주영 씨는 하필 소 천 마리를 고향으로 몰고 가려고 했습니까?

우리국민들은 우리 나라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북한에다 소를 몰아다 주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연은 젊은 시절 아버지의 소 판돈을 훔쳐서 가출하여 남쪽에 와서 대기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속죄의 대가로 훔친 소 값의 천 배인

소 천마리를 몰고 가기로 하고 일차 분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건널 때 그것은 과연 장관이었습니다. 두 번째 소를 몰고 갈 때는 그 아들이 다녀왔습니다. 이 사실을 연상시키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야곱은 눈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빼앗은 사기 행각을 하다가 결국은 가출했고 외국에서 천고만신 끝에 20년 만에 돈을 많이 벌어서 다시 고향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향 길에 양, 염소, 소, 낙타 등의 짐승 떼를 몰고 가는 모습에 정주영씨의 방북모습과 연상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야곱은 짐승 떼를 몰고 고향 길로 들어섰으나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 때문에 떨었습니다. 즐겁고 희망찬 귀향 길이어야 할 터인데 왜 이처럼 가슴이 짓눌리는 것입니까? 더구나 형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가까이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야곱의 가슴에 일고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형에서와 한번은 대면해야 했고 화해를 해야 했습니다. 형님이 무섭고 두렵다고 해서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형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도망쳐 나와서 객지 이방 땅에 가서 거한지 2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야곱의 마음가운데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영육간의 축복을 빼앗은 것에 대한 괴뇌와 두려움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형을 대면할 순간이 다가오자 그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공포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죄로 말미암은 불안과 공포는 용서함 받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은 모두가 그 깊은 내막을 열어보면 죄악 때문입니다. 더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원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답답함과 억눌림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해결 받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현대인은 이런 불안과 공포의 심리 때문에 완전히 초죽음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런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죄에서부터의 해방이어야 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있는 불안과 두려움과 나를 억압하고 있는 답답함이 어디서 근원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이는 단순히 의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야곱은 처음에 이런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웠습니다.

즉 형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선물 공세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즉 암염소 2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10마리, 젖나는 약대 30마리, 등을 두 떼로 나누어서 만약 형에서가 한떼를치면 다른 한 떼는 도망하는 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

정말 야곱은 전략가답게 소위 1중대 2중대로 나누어서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문제를 물질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마치 현대인들이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심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돈과 물질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깊은 절망과 고독, 불안과 두려움을 이긴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에게 매달려 기도했을 때 응답 받았고 새 사람이 됨으로서 문제해결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고향으로 가기 전에 형과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그의 혈육에 속한 사람, 아니 그보다 인간적이고 수단과,

술수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성공을 쟁취하려고 했던 야곱의 이중성, 사기성, 그리고 그의 죄성을 성결케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군대를 먼저 보내었습니다. 아마 천사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하여간 야곱의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야곱으로 하여금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야곱과 밤이 새도록 씨름했다는 분은 하나님의 사자 또는 천사로 생각하는 분도 있으나 호세아 12장에 있는 대로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호세아12:3-5절에서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도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실체를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없으나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현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야곱과 씨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분은 바로 성육신 하시기 전에 구약에서 일하시던 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다.

하여간 오늘 이 시간 말씀드리고자 하는 골격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실존과 그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그의 고뇌를 아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시고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야곱은 비록 문제가 많고 죄악과 실수, 거짓 투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하나님의 위대하고 웅장한 구속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야곱을 결정적 시기마다 찾아오시고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이며, 하나님의 구속운동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절망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있습니다. 죄 지은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이 있기에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심해지면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깊은 병으로 바뀌어집니다. 인간의 병중에 제일 큰 병은 바로 죄악의 병입니다. 죄악의 병을 고쳐주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육신의 병은 의사가 고쳐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낫게 하십니다.

그러나 영혼의 병, 곧 죄의 병은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영혼의 병이 고쳐질 때 육신의 병도 고쳐집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은혜 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비상조치를 취하였지만 야곱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즉 야곱의 반응은 곧 우리의 반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구체적 신앙생활에 적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야곱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그가 취했던 행동은 어떠했습니까?

첫째로, 그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4절),
야곱은 형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선물공세를 했습니다. 한 떼와 두 떼로 나누어서 완벽하게 작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불안하고 두렵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만 20절에 있는 대로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물 행렬 뒤에는 두 아내와 종들과 그리고 아들들을 한 그룹으로 만들어 얍복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이제는 야곱 혼자서 얍복강가에 서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자기 검증이 필요했고 영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20년 전에 도망쳐 나올 때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던 것처럼, 또 다시 고향을 앞에 두고 형의 분노와 아버지의 분노를 생각하면서 그는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내들의 위로 자식들의 재롱도 다 물리쳤습니다.

사실 살다가보면 그런 끈끈한 가족관계가 영적인 침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조용히, 혼자서 기도할 수 있는 영적인 훈련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름수련회도 필요하고 고요하게 기도할 수 있는 기도원도 필요하고 자기만의 골방이 필요합니다.

야곱이 홀로 있으면서 20년 동안 살아왔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고요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할 때만이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즉 9절에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라고 회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또 말하기를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강을 건넜더니 기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10절)고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닌 것이 없다는 진솔한 신앙고백입니다.

둘째로, 야곱은 적극적이고 생명을 건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홀로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신앙고백하는 것도 필요하나 때로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기 위해서 전투적인 기도도 필요합니다. 야곱은 얍복강 강가에서 어떤 사람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현현이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씨름은 단순히 육체적인 힘 겨루기만이 아니라, 영적인 투쟁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축복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결사적인 기도였습니다.

호세아12:3-4절에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뤄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응답이 있을 때까지 밤이 새도록 울며 뒹굴며 발버둥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평생다리를 절게 했습니다. 야곱의 이기주의, 자기 중심적인 사상과 그의 인간적인 죄를 꺾어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고자 했습니다. 사실 이것이 야곱의 장점입니다. 부족해도 못생겨도 문제가 많아도, 그리고 허물이 많고 죄도 많고 실수가 많아도 하나님의 축복 없이는 살 수 없고 기어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살겠다는 그의 마음이 장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신분의 변화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불안, 두려움, 긴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서 간구하는 모든 기도의 제목마다 응답 받아서 그리스도인의 복된 살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자 : 박봉웅 목사.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