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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번 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1-19절),

대산지기 2008. 2. 28. 15:22
번 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1-19, 167.168.377.478장&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있습니다. 무엇 일까요? 시험입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직장인은 직장에서 군인은 영내에서 시험을 통하여 승진하고, 진급하고 학생은 상급학교 진학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학생들은 시험 없는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도 합니다.

각종 시험이 참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치르도록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게 하기 위하여 최종적인 시험을 하였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일생동안 신앙의 여정이나 시험의 점수는 언제나 A+ 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F 학점도 있고 어떤 때는 보통의 때도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훤히 아시지만 사랑하는 아들이삭을 얻은 후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고 하나님보다는 아들 이삭을,

보는 노령의 재미가 더해 갔음으로 하나님은 참으로 하나님중심의 신앙고백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 의 내용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이 본문의 흐름을 자세히 살피면서 이 말씀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깊은 진리와 교훈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행위보다는 하나님께서 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 제로 드리라고 하시는지 그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불신 가정에서 부르셨고 자녀를 생산하기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부부를 불러서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시고자 하는 그 자체에는 처음부터 위대한 구속사역을 이루려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른지 25년만에 아브라함이 100세 되던 해에 90세의 사라의 몸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 아들 이삭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이삭의 나이가 몇 살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번제에 쓸 나무를 스스로 짊어지고 갈 수 있고 틤沅贊蹈?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으로 봐서 10대의 소년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무엇 때문에 이토록 엄청난 시험을 하시는 겁니까?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삭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하고 사랑스런 아들이었습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가 15세라면 아브라함의 나이는 벌써 115세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아들 이삭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입니까? 사랑하는 아들 독자를 제물로 바치라니요 그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애지중지 하는 아들 이삭이 한참 아름답게 귀엽게 자라는 시기에 죽일 것이면 무엇 때문에 25년을 기다리다가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기적으로 아들을 주셨는가 함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명령을 하자마자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그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물론 이 본문에는 이토록 큰 일을 사라에게 의논했다는 말도 없고 아브라함이 고뇌했다는 어떤 말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배후에 대해서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본문의 흐름과 내용을 그대로 받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 대해서 신약성경 두 곳에서 깊은 해석을 내리고 있음을 봐야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언제나 성경이 성경을 깊이 해석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로마서4:17-18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100세에 난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만한 뜻이 있을 것이며 혹은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케 하실 줄 믿었던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1:17-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았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받았는데 그 자녀를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는 다시 살려서라도 기어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을 이룰 줄 믿었습니다. 사실 이 본문을 보면 이삭은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번 제할 나무를 지고 삼일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려고 하는 아비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다. 거의 목적지에 다 닿았을 때에 이삭이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 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비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졌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태연히 그리고 믿음으로 말하기를 “아들아 번 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절), 고 했습니다. 부자 지간의 대화 속에서 성경계시의 웅장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질문한대로 번 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의 대답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생들을 구속하기 위한 위대한 골격입니다. 결국 출애굽 때에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뿌리므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절),고 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면서 “그가 곤욕을 당하며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며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9사53:7절)라고 했습니다.

결국 창 22:1-19절에 보여주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제단에 번 제로 올려 놓은 것은 장차 인생을 구속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독자 예수님을 내어놓는 하나님의 아픔이 있음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독자 이삭을 바치라 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이 얼마나 특별한 사랑에 근거하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즉 마치 아브라함이 100세에 난 아들 이삭을 번 제물로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3:16절),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위기순간에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아들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절),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 이레 곧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로 수양을 잡아 번 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큰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몇 가지 깊은 진리를 배우게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 곧 테스트를 할 때는 분명히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복을 주시기 위함인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이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구속운동의 비밀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시험을 잘 이기는 자에게는 말씀의 깊이를 더욱 깨닫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토록 크신 사랑과 이토록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이것 저것 이야기를 모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원의 멧시지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멧세지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먼저 녹아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아브라함의 철저한 순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이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고 해도 그렇게 몹쓸 사람이라고 욕하지 못할 것입니다. 100세에 난 귀한 아들을 아비가 죽여서 번 제로 드리라니 정말 하나님이 이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항변한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까지 한 마당이고 보면 불순종할 수 있는 이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즉시 100 % 순종했습니다. 이삭을 생각해보면 그는 아버지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번제드리는 아버지와 동행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와서 사랑하는 아버지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몸이 밧줄에 묶여져 제단 위에 올려졌습니다. 그는 혈기 많은 청소년이요 아버지는 이미 115세 전후한 노인인데도 마음만 먹었다면 그 자리를 뿌리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가 하는 대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삭의 순종도 아브라함의 순종 못지 않게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부자가 믿었던 그 신앙과 그 순종은 순도 100 %의 순종이요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과 순종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또한 모범을 보이고 기적을 보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예수 믿는 것은 바로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도들은 말은 믿는 것 같으나 100 %의 신앙과 순종의 삶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 하나에 시비를 걸고 이유를 달고,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자기 희생은 없습니다. 모두들 손해 안 보려고 합니다. 고생도 다른 사람이 하도록 하고 자기는 빠져나갑니다. 그래서 영 육간에 아울러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완전한 믿음,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기적을 체험합니다. 믿는 듯이 안 믿는 듯이, 성도인 듯, 아닌 듯, 적당히 줄타기를 해서는 신앙의 재미를 못 봅니다.

오늘 날 처럼 문제가 많고 영적으로 경제적으로 불안한 이때에 한번 제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힘있게 붙들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걸어가서 승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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